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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클라스, 조선시대 법의학 역사학자 김호

by 로토루아8 2018.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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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클라스, 크라임씬

남편 안재찬은 즉시 경찰에 신고했고 며칠전 있었던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는데..

부인이 옆집 남자 정이문에게 겁탈을 당할 뻔한 순간 자신이 그 광격을 목격해 미수에 그쳤다는 것.

정신적 충격을 받은 황미리는 이웃 남자 집 앞에서 자살했다고 진술

의심스럽게도 이웃 남자 정이문은 도주한 상황임

조선시대 법의학 연구의 문을 연 역사학자 김호교수

이 사건은 100년 전 조선 시대에 있었던 실제 사건이에요.

왕과 양반 중심의 조선시대 사료들 그 시대를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선생님

그런 자료는 없는 거에요. 민초들의 이야기를 찾기 시작함

그곳에서 당시 살인사건 자료를 발견했는데


서울대 규장각에서 600여 건의 검안을 보관함

당시 세태도 엿볼수 있는 자료에요. 사건 진술 속에 담긴 민초들의 삶

밤낮없이 조선 살인사건 연구에 매진을 했다고

그때 연구했던 자료를 토대로 드라마 별순검이 탄생했다고해요.

2000년대 초 검안을 연구해 학계에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흔쾌히 자문을 수락한 선생님

문화콘텐츠로 승화된 선생님의 연구자료

오늘의 강연주제는 억울함을 없게 하라

실제 역사 속의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조선의 범죄 해결이 주된 내용은?

범죄 해결의 가장 중요한건 제대로 된 수사

수사를 하는 목적? 범죄자 응징 억울함 해소

과학수사는 하나의 수단인 거죠.

범인을 잘못 잡으면 그것도 억울한 거잖아요. 정확히 잡기 위해 과학수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감춰진 사인까지 밝혀낸 검시 조선의 과학수사

살인사건 고발 체계는 목격자가 마을 책임자에게 얘기하고 사또에게 얘기하잖아요.

접수완료되면 바로 지체없이 출동함

사건 현장 보존 의무가 있어요.

현장에서 대기하며 사건 관련자를 감시하는데 사또가 조수들과 함께 현장에 도착하고

사건 관련자의 입회하에 현장조사를 진행함

현장 수사부터 판결까지

조선사건, 사고 계의 멀티  플레이어인 사또


현장 조사와 검시 과정을 사또가 관할하는데

기산 김준근은 살인에 검시하는 모양

사또가 직접 검시를 하는 것이 원칙이에요. 사체 76개 부분을 자세히 살펴 기록하는게 형정도첩

사건 배경, 의복, 무기등등을 정밀히 묘사함

관련자는 일단 옥사행입니다. 구속 수사가 기본임

현재는 강력범죄, 도주 위험이 있을때 구속수사를 하는데 조선 시대에도 살인사건 위중한 사건일 경우에는

신병 확보를 위해 구속수사를 실시함 검시 결과를 토대로 사건 관련자를 심문함

해당 지역 사또가 초검으로 1차 조사를 종결하고 도 관찰사가 초검 조사 내용을 상부에 보고함

도 관찰사는 인근 지역 사또에게 2차 조사를 명령함

혹시 있을 비리를 방지하기 위해 1차 조사 사또는 외출 금지임

이후 2차 좆사 결과를 상부에 보고하고 1차 사또와 2차 사또는 교류가 불가함

수사 과정의 독립성을 철저히 보장하기 위함임

1차조사가 타살이고 2차조사도 타살이면 일치로 사건이 종결됨

도 관찰사가 양형 의견을 첨부해 중앙정부에 보고를 하는데

지금의 법무부인 형조가 최종 판결을 더해 왕에게 보고를 하는데

중대한 사건은 이를 바탕으로 왕이 최종 형량을 결정해요.

하지만 정조는 모든 절차를 일일이 검토함

1차수사와 2차가 다르면 

처음에 얘기한 문경 황씨 부인 사망사건의 전말은

구타가능성을 보여주는 흔적들임 타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


시형도는 사체의 앞, 뒷면의 76개 부위를 자세히 살펴 그 상태를 그림으로 기록함

양반 부녀자의 사인이 확실한 경우 검시를 거부할 수 있는 면검권을 부여함

하지만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죠.

비록 일부지만, 죽은 자의 명예까지 고민했던 조선시대..

부검전 현대 법의학에서도 시체의 외부를 확인하는데 사인 판별을 위한 참고 과정 중 하나에요.

시신이 부패해서 검은색이 되면 아예 안색을 확인할수 없잖아요.

사건이 접수되면 신속히 출동해야 하는 이유에요.

타살 가능성을 암시함

증수무원록을 보면 사건 수사를 위한 조선의 법의학서에요.

원통함을 없게 하기 위한 책임

조선시대 관리들의 가이드북인 무원록


스스로 목을 매고 죽은경우를 설명했는데 

이는 스스로 목을 맨것이 아니다. 타살후 대들보에 매달리 경우에는 저하이 불가하니

자살일 경우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대들보에 줄 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짐

대들보 먼지가 한줄만 나 있다면 타살을 자살로 위장한 증거

대들보에 선명하게 그어진 한 줄 명백한 타살이죠!!!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일까요?

조선수사 원칙 2. 자백이 필수임

고문에의한 거짓 자백의 가능성은? 그럴경우 자백의 효력이 사라지잖아요.

그래서 과학 수사를 통해서 선 객관적 증거를 확보하고 후 자백을 유도합니다.

지금과 다를게 없어요.

저런 증거를 가지고 사또가 죄를 추궁하자 당연히 자백했죠.

남편의 자백으로 사건 종결하고 타살로 보고

정리 중에 진술이 변질될 것을 우려했기때문에 구어체로 기록하는 것이 원칙이에요.

조선판 녹취기록!!

현재 경찰 조사와 흡사한 조선의 수사 방법임

결국에 이런 판결은 무원록 덕분에 가능 했던 일이라고함

무원록은 중국 원나라 왕여가 만든 법의학서로 조선 전기부터 이를 수입해 사용함

몽골어+ 한문= ???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업그레이드된 무원록

증수무원록은 신주무원록을 보강해 조선의 실정에 맞는 무원록을 편찬함

무원록 업글은 조선의 저으이 구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함

누구보다 백성을 생각했던 왕들인 세종 영조 정조가  업그레이드를 해줬다고.

책으로 편찬해 전국으로 배포함

억울한 백성이 없게 하기 위한 왕들의 노력..

무원록을 토대로 정의 구현에 앞장섰던 사또들..

저런 이들이 자꾸 벌어지는 거에요. 위장 살인을 하는 케이스가 늘어나고 위장 살인 수법을 밝히기 위한 기술도 발전함

예를 들어 왼손,, 오른손에 따라 상처가 다른것도 증명함

주저흔, 망설임의 흔적이 있기 마련이에요.

타살의 여부는 물론 범인의 특징까지 파악이 가능해요. 원통함을 없애기 위한 지침서인 증수무원록

끊임없는 실험으로 가능했던 일

현대 과학수사에 사용되는 루미놀 반응 루미놀은 시약으로 혈흔을 확인하는 방법 중 하나죠.

300년 전부터 끝없는 노력으로 과학수사를 발전시켜온 조선

검시에 사용된 재료가

현대 법의학의 화학 반응 검사와 유사합니다.

은비녀 술과 시곷, 솜, 파와 닭

1. 파, 감초등을 찧거나 끓여서 2. 부패한 시신에 발라주면

3. 보이지 않던 상처가 드러남

나머지는 어떻게 쓰였을까?


솜이 물에 젖지 않으면 죽인뒤 익사로 꾸민것.

죽인후 익사로 꾸몄을 경우에는  물속에서 호흡하지 않아 폐에 물이 없어요.

반면 익사했을 경우 몸에 부유물이 존재해요.

1. 해골의 정수리에 따뜻한 물을 부어 2. 콧구멍으로 진흙이 나오는지 확인함

시체의 골절 여부를 파악할 때 부러진 뼈의 부위와 방향을 살피기 위해 솜을 사용함

그러면 솜이 뼈에 걸릴거 아니에요.

뼈의 골절 부위와 모양을 확인하기 위한 방법임

일종의 엑스레이처럼 먹물의 선으로 구타 여부를 파악함 또다른 응용법물은 조협

조협은 약재로 쓰이는 쥐엄나무의 열매에요.

조협을 끓이면 미끄러운 비누 같은게 나와요. 당시 조협을 끓인 물은 비루물이에요.

지금의 비누의 어원이 된 비루는 더러움을 날린다는 뜻이에요.

조협을 끓인 물로 세탁을하고 시신을 닦는데도 사용함

흔히 은비녀를 시체의 입에 넣고 뺐을대 색이 검게 변하면 독살

독뿐만 아니라 다른 물질에도 쉽게 변색되는 은비녀

닭의 생사에 따라 독살 여부를 판별하는데

조선시대에 한번은 그런 일이 있었나봐요. 검시에 사용한 닭을 버리고간 사또

그닭을 먹고 탈이난 사람들..

점반법은 

1. 찹쌀과 수수밥을 오리 알 흰자위와 반죽 2. 시체의 입안에 넣고 훈증

3. 독살일 경우 반죽이 검게 변함

오리 알의 흰자위에만 섞는게 포인트에요.

오늘과 같은 과학수사를 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억울함을 없애개 위해 노력했던 조선의 법의학

정확한 수사만큼 중요한 형벌과 교화

대명률이라고 중국 명나라의 형률서로 조선 건국 때부터 이를 전수해 사용함

대명률의 오형제도

태형

장형, 도형, 관아에 가둬놓고 강제노동으로 처벌

보통 살인사건의 경우에는 사형, 그리고 유배형

조선 시대 단골 유배지는 제주죠.

위리안치라해서 중죄인의 거주지 둘레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가두어 두던 형벌이에요.

정기적으로 거주지를 고을 사또에게 보고해야함

이러한 중국의 명률을 기초로 경국대전, 속대전, 대전통편등 조선의 실정에 맞는 법을 제정함

속대전은 대명률을 따르던 것에서 벗어나 조선 실정에 맞는 형률을 정비함.

예컨대 누군가 부모를 폭행하는 것을 목격한다면?

대명률은 살인으로 판단.

속대전의 경우는 어떨까요?

속대전은 윤리와 도덕을 강조함 영조가 도덕을 강조한 이유는?

범죄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제일좋은건 뭘까요? 처벌보다 교육이 우선이에요.

엄벌로 다스린 나라는 40년을 못 가더라.

법으로 백성을 다스리기 보다는 사람의 마음에 덕을 심어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흠휼전칙은 정조가 즉위한 해에 만든 법률서로 형벌의 도구와 방법을 규격화함

흠 사건을 신중히 다루어

휼 억울한 죄인이 없도록 하라.

형벌의 도구는 물론 처벌 가능한 신체 부위까지 규정함

무자비한 고문을 막기 위해 만든 법률

모든 살인 사건을 일일이 검토했던 정조

혹시라도 억울한 백성이 있을까봐 자료를 꼼꼼히 검토한 정조

사형으로 보고된 사건만 1100여건으로

천명중 300명은 풀어준 셈임 죄인의 인권까지 생각한 정조

사람을 향한 정조의 믿음 이것이 조선 성리학의 특징이죠.

심성론.

타고난 마음을 중심으로 인간의 존재를 해석함


성선설은 사람은 본래 착하다.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고 보는 성악설의 순자의 주장보다 맹자의 해석을 따랐던 조선

도덕을 중시한 이상주의자인 정조

정조가 꿈꾸던 조선은 어떤 나라일까?

국가를 통치하는데 법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면 범죄를 줄일 수 있을까

이건 조선시대 임금들이 공부하던 책이에요.

대학연의는 사서의 하나인 대학의 이치를 해설한 책으로

" 도덕과 예절의 효과는 시간이 흐른뒤 알수 있다."

도덕으로 사람을 바꿀수 있다. 형벌은 수단일 뿐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다.

백성들의 범죄율을 낮추기 위한 방법은?

1. 환경조성

2. 교육

"가르치지 않은 채 처벌하는 것이야말로 학정이다."

도덕 교육에 주목한 정조

정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앞장서고 불의를 보면 분노하라!!

사람다운 행동을 강조한 정조

성선설을 믿는 사람들이 주변에 그렇지 않은 사람의 행위를 보게되면

그렇기때문에 법이 필요한 것이라고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신뢰가

법과 도덕의 저울에서 도덕에 무게를 실은 조선

오늘날에도 계속 고민되는 거죠

때로는 엄벌주의가 낫지 않나 싶기두하다고..

거듭되는 잔혹 범죄 현대에도 이어지는 처벌과 교화를 둘러싼 논란

" 조선에 비해 중국은 사형을 하는 비율이 100배나 많다."

중범죄의 경우 엄형으로 다스린 중국

엄벌주의도 한계가 있고 교화만으로도 한계는 존재합니다.

법과 도덕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통치의 핵심임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는 이야기임

모범이 되는 사람을 칭찬해요.

제주도의 만덕이라는 사람 이야기 아세요?

김만덕은 기녀로 일해 번 돈으로 유통업을 시작해 막대한 부를 형성한 사업가에요.

큰 기근으로 사람들이 굶어 죽자 전 재산으로 쌀을 구입함

제주도민들에게 전부 나눠준 김만덕

최고의 특혜인 임금과의 만남이 이루어짐

만덕의 소원을 들어준 정조 게다가 김만덕 전기를 만들어 배포하기까지함

그야말로 살아있는 도덕 교과서이죠.


한 남자와 은애의 중매를 계획한 매파. 그런데 중간에 중매가 틀어져서

은애에게 앙심을 품고 모함하기 시작함

수치심을 느낀 은애는 결국 노파를 살해함

즉시 관아로 가서 자수를 한 은애 정조의 판결은?

불의에 저항해 용기를 낸 은애를 칭찬하지 않을수 없다며 정상참작이 들어가는 거에요.

살인을 하면 사형이지만 이러면 정의가 훼손되고 지나친 관용도 정의를 훼손하는 것

처벌받지 않았어요.

당시에도 몇몇은 은애의 살인이 지나치다 비판함

다산 정약용이에요.

당연히 그렇게되면 인륜에 의한 복수, 명예살인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거든요.

도덕과 정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더 큰 사회문제를 야기할지도..

도덕에 대한 신뢰를 강화할수록 가짜도덕인 위선이 등장함

죄의유경

한사람이라도 억울한 이를 죽이느니 차라리 법의 집행이 문제라는 비판을 듣겠다.

조선판 무죄 추정의 원칙이에요.

현대 사형제도 폐지 주장과 비슷하다고하네요.

그래서 의옥이 되면 처벌할 수가 없는거에요.

억울한 죄인이 희생될 것을 우려해 의옥일 경우 벌금형으로 가볍게 처벌함

살인사건의 증거를 훼손하거나 증언을 번복하는 등 미제 사건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증가함

무려 5차로 조선 시대 사건 조사 횟수가 랭킹 1위임

그런데 난리가 난 거죠.

난장판이된 김조이의 집 

조카의 몸 곳곳에서 발견된 폭행의 흔적

1.2차 모두 자살로 판명 사건이 이걸로 종결될뻔했어요.

이사실을 납득할수 없었던 유가족들은 신문고를 활용함

격쟁을 해서 3차 조사를 진행햇는데 결정적인 증언을 한 여자 노비

남편이 김조이를 살해하던 현장을 목격했지만 주인이 무서워 위증했다고 실토한 노비

그런데도 끝까지 혐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시어머니 노비의 증언과 검시 결과에 비추어

타살로 결론을 내린 3검 사또

가족들은 3검 사또의 모진 고문과 자백 강요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주장함

3검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려는 시도로 4검관이 4차 조사를 하러 갔는데 자살로 판결됨

이후 추가 합동조사를 실시하여

하지만 이미 남편은 도주한 상황임

거듭된 진술 번복으로 수사 횟수를 늘릴수록 판결이 어려워지는 상황임 결국 의옥으로 남는 것.

권력이 있고 돈있는 사람들이 많은 살인사건을 의옥으로 만드는 거에요.

지금도 권력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고도 집행유예를 받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죠.

유전무죄 무전유죄

과실을 범한 수령의 처벌은 없었나요? 수령은 다 파직됩니다.


천한 사람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는게 대단한 것 같네요.

여자도 증언이 가능했던 조선 시대 

같은시기에 전 세계에서 여성의 증언을 수용한 나라가 적은 상황을 보면

차별없이 증언으로 여자노비를 채택함.

흥미를 돋우는 또 다른 사건은?

힌트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사건이라고함

사건 포인트 1. 거짓으로 모함한 사건?

반좌라해서 죄 없는 자를 거짓으로 고발했다가 무고임이 밝혀지면 고발한 자가 형을 대신 받음

임씨의 행동은 무턱대고 유씨를 모함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움

조선의 관점에서는 정의를 구현한 것

지금과는 많이 다른 당시 상황

임씨의 행동은 오지랖으로 보이지만 자칫하면 마녀사냥이 될수도..

그런데 임충호가 확인되지 않은 추문을 퍼뜨렸고  씻을수 없는 모욕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누명을 쓰고 죽으니 나의 원수를 누가 갚아줄까요.

피해자에게는 사회적 사형을 선고한 것이라고

피해자 유씨의 죽음은 임충호의 책임입니다.


인간의 도리와 예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윤씨의 부도덕함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 마을에 기강을 잡기 위해

임충호는 진실을 알리는 정의로운 행동을 한 것입니다.

자살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선택이었습니다.

불의를 참지 않고 정의로운 행동을 한 피고에게 자살교사죄를 적용하는 건 부당합니다.

유씨가 자살을 선택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가?

모함으로 자살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사회에서 마녀사냥을 방조하는 셈이라고

지금도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무고와 정의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제대로된 증거로 문제를 제기했다면 정의의 목소리라고 할수도 있잖아요.

도덕감정과 법 제도의 균형을 잡는 것은  조선 시대는 물론 현재도 쉽지 않은 일임

자살의 직접적인 책임을 묻는 건 아니고 여섯 명의 자식과 함께 친척 집에 시기하던 한 여인이 있는데

도둑으로 몰린 서글픔에 여섯 아이를 물에 밀어넣고 자살한 사건임

위핍률을 저지른 자는 장 100대

이 사건을 정조 임금이 판결하게 됐거든요 

나라의 정의가 서지 않을 것이다. 괘씸죄를 추가해 엄형에 처할 방법을 모색하라고 주문함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갔을때 이 내용을 보게 된거에요.

이경우 5촌 숙부에게 아이들의 죽음까지 묻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억울해서 스스로 죽을 마음을 먹은 것은 이해하지만 결국 엄마가 여섯 명의 아이를 죽인 것

다산 정약용이 생각한 정의는 인륜을 내세운 지나친 관용은 문제라고

엄벌로만 다스리는 것 또한 문제


정조에비해 정약욕은 도덕보다 법리를 추구함

재량을 남발하면 법의 안정성을 저해함

조선이라는 나라가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법 정의를 연구했던 다산 정약용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라

1. 도덕 감정 고려

2. 사건 전후 관계를 파악하고 3. 법리를 검토

법의 안정성을 확보해야 이상적인 나라가 되는 것.

조선이나 지금이나 다른게 없습니다.

다산 정약용이 보여준 법의 정신은 당연히 오늘날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죠.

죄형법정주의는 권력자의 재량을 제한하기 위해 형벌을 법으로 규정함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조선의 노력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온 사람들... 도덕을 통한 교화를 중시한 정조

불공정한 법 집행을 경계했던 다산 정약용 달라보이지만 같은 목표를 꿈꿨던 이들...

법과 정의에 대해 깊이 고민해왔던 조선시대

지금과 연결된 그 시대의 지혜를 엿보는 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이죠.

조선이 꿈꾸던 저으이가 지금과 다르지 않구나..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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