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죠.
지난 백년 우리 민족이 겪은 수많은 위기에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했는지 되돌아보고
지금 우리 모습에 비추어 백년, 천년을 설계해보기 위해 준비한 오늘의 강의 나의 소원
2017년 전 세계가 주목했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정신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민주주의 중심에 있던 평범한 우리가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1987년 6월 민주항쟁, 1980년 5.18 민주화운동 1979년 부마항쟁 1960년 4.19혁명
그리고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독립을 향해 외친 민중의 함성. 그로부터 한달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우리의 힘으로 이루고 싶었던 자주독립.
두아이의 아버지도, 일본식 교육에 길들여진 조선인도, 100년의 역사 그들이 품었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100년 전으로 시간여행 해봅시다.
일본에게 우리의 주권을 잃고 식민 지배를 당했던 상황에 3.1 운동의 전조발생.
평화회담에서 나온 얘기가 민족자결주의!
약소민족이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도록 해방하자는 취지였는데 당시 강대국이었던 소련은
비록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희망으로 뛰기 시작한 심장!
우린 독립하고 싶다는 의지를 세상에 보여주자!
독립을 향한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게 되고 3.1운동 배경 중 하나가 민족자결주의에요.
그리고 또 하나 적진의 심장부!
동경 한복판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외친 2.8 독립선언.
식민 지배에 대한 내용의 우리의 독립의지
만일의 경우 육탄 혈전도 벌인다!!!
모든 불상사에 우리 민족은 책임이 없다.
송계백은 모자 구부러진 부분에 독립선언서를 넣어 국내로 비밀리에 들여와 민족지도자들에게 전달함.
이말에 우리도 만세 시위에 동참하자며 그렇게 계획된 3.1운동
3.1 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위기.
천도교 소속 보성사 인쇄소에서 밤에 몰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중 불빛이 새어나간거에요.
때마침 들이닥친 친일파 경찰인 신철은 일본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악독하게 괴롭히며 고문을 하는사람인데
인쇄소 주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종일 선생은 무릎을 꿇고선....
" 당신도 조선사람 아닙니까. 지금 당신의 결정에 우리의 역사와 민족의 미래가 달려있소.
한번만... 한번만 못본척해주시오."
거사를 앞두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
당시 쌀 약 120가마니 가격인 5000원을 건네준 손병희선생.
그돈을 경찰에게주고 가까스로 위기의 상황을 넘기게 된...
그리고 3.1운동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다는 일화 중 하나가 또 한번의 위기
리어카에 싣고 가는데 경찰들이 보고 이게 뭐냐고 물음
근데 때마침 정전이 일어나고 우리집안의 족보라고 하니깐 확인해보고 가라고해서..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넘겨 3.1 운동이 시작됩니다.
3.1 운동이 가져온 엄청난 결과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3.1운동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됩니다.
핍박받고 당하고 무력했던 독립운동의 준비단계를 거쳐 독립의지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국제 여론 조성까지!
민족운동이자 무장 독립운동의 계기가 되었고
3.1운동의 유산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생기게되죠.
비조직적이라는 단점....
왜 붉은악마 없는 대한민국 축구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도 정부를 만들어 보자!!
3.1운동후 임시정부가 생겼는데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다수의 임시정부로 통합이 필요해요.
일본의 감시로 국내로의 통합은 불가능해서 러시아와 중국을 놓고 고민하다가 상하이에 하게되죠.
두만강의 강폭이 좁아 전투를 벌이기 쉬운 위치에요.
러시아 연해주는 무장독립투쟁에는 탁월함 그러나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는 외교독립론을 추구
팽팽한 대립중 도산 안창호가
외국인 자치구역인 조계지가 많았던 상하이 그중 프랑스 조계지가 좋겠다고
영국은 영일동맹때문에 안되고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날수 있는 프랑스 자치 구역에 터를 잡게된 상하이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게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조국인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비롯됨
헌법을 보신적 있으신가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약 100년전, 안창호 선생에게서 나온 말이에요.
독립신문에 실린 1920년 안창호 선생의 신년사..
지금 우리나라에 황제가 있습니까? 황제가 있습니다.
그 황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옛날에는 황제가 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가 황제입니다.
대통령, 국무총리 정부직원은 우리의 노복이니 우리 황제들은 이제부터 노복을 인도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노복인 정부 직원은 황제인 국민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 연구해야 합니다.
노복들은 절대 한 사람의 명령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우리모두가 모였을 때 우리의 주권이 완성되는 것이니 우리 모두의 명령을 따라야지..
특정인의 권력에 좌지우지돼서는 안됩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2019년 대한민국 국민에게 꼭 필요한 말이죠.
99년 안창호 선생의 신년사에서 비롯된 대한민국헌법 전문의 초석.
임시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이 비롯됐다고 보는 이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된 이유는?
나이가 많아요. 1875년생으로 강화도 조약 1년전에 태어남.
이승만 대통령 스펙을 보면 당시 미국에서 박사학위 취득을 했고 일단 똑똑함
하지만 반대하는 이가 등장.
단재 신채호는 무장투쟁론자고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자
신채호 선생의 별명은 칼 찬 선비에요. 의열단의 행동지침으로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했는데
독립을 위한 필요조건이 파괴, 폭동, 암살임.
강대국의 이익이 맞아 떨어져서 얻어걸린 거라고 순진한 소리 좀 그만하라고
이승만이 대통령을 한다고? 반대라고
이승만 대통령 선임후 견해 차이로 임시정부를 떠나 자신이 추구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힘썼던 신채호선생
출범 5년차에 접어들었지만 성과가 없음.
독립운동의 기미는 없고 일제 정보망에 걸려 국내 지방조직은 파괴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상하이에 머물렀던 시간은 6개월 정도임
이승만 대통령의 주요 활동지는 미국으로 미국에서 독립을 호소하겠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좋지 않았던 선택이었죠.
신채호는 상하이로 사람들을 불려드려
이승만 대통령 탄핵 및 임시정부 방향성에 대한 회의를 소집함. 그게 국민대표회의에요.
창조파와 개조파의 팽팽한 대립이 이어지던 그때!!
제 3의 인물이 등장함
나! 임시정부 내무총장인데 당신들 지금 조국을 기만하는거야?!
백범의 뜻 알고 있으셨나요?
미천한 사람부터 평범한 모든 이들 즉 민중을 대변한다.
관직과 옥좌는 사치임 평범한 사람의 눈높이에서 살겠다는 뜻임.
결국 해산된 국민대표회의 그리고 2년 뒤 이승만 대통령 탄핵이 의결되고
내각책임제로 개정하자는 의견
대통령에서 국무령 중심으로 2차 개헌을 한 내각책임제
국무령에 이상룡, 김구 등에 의해 국무령제가 이어지다가 떠나가는 사람들...
왜냐면 국내지원금이 없어지게되고 재정문제가 심각했던 상황.
책임감을 심어주면 안 떠나겠거니.. 해서 모두가 국무위원이 되어 집단 지도체제인 이것이 바로 3차개헌
국무위원 중심의 집단 지도 체제..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고..ㅠㅠ
그래서 최소 인원으로 저력을 보여줄 방법은?
1931년 탄생한 의열단체는 한인애국단이에요.
김구에게 찾아온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조선말이 어눌한데 일어는 유창함 스파이일지 모르니 음주 테스트를 했더니
술만 먹으면 일본 노래 흥얼흥얼~ 속사정을 알고보니 더 기가 막혔다고
시대를 잘못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봉창은 장래희망이 일본인 이었음
교육받은대로 믿었던 그저 평범했던 사람이엇는데 일본식 교육을 받아 일본인이 되는게 정답이라고 생각
뭘해도 무시당하기 십상이었다고. 일왕 즉위식 구경중에 갑자기 체포되었는데
조선인이라는 이유였다고...
조선인으로서 뭘 해야 하지? 나라부터 찾자!
내눈앞의 일왕을 처단하겠다고 생각했는데 폭탄이 필요해 큰뜻을 품고 상하이로 옴
거사 준비후 도쿄로 떠난 이봉창은 사쿠라다몬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함
하지만 일왕 암살엔 실패하게되었어요. 당황은 여기서 끝이 아님.
애꿎은 시민을 붙잡은 일본 경찰
훗날을 도모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할수 있는데
범인은 바로 나라고 잡아가라고 당당히 맞선 이봉창.
왜 그랬냐고 묻자 나라를 구하려고 정당하게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지만 내 행동으로 피해주고 싶지 않은 마음
정당한 의거 활동에 대한 자수일뿐..
나라를 위해 목숩을 바친 이봉창 의사.
" 제 나이 이제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살을 더 산다고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조선 독립의 뜻을 알리겠다며 폭탄을 던진 위대한 의사
의거는 실패로 끝났지만 웃으며 별이 되다.
이봉창 의거는 성공? 실패?
또 다른 의거활동의 신호탄이 된 이봉창의 희생
윤봉길의사!!
조국을 떠나며 남긴 글이 있는데
사나이 대장부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편지를 남기고 홀연히 떠난 윤봉길 의사
더욱 가슴 아픈 이유는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둔 가장이기 때문이에요.
세상을 바꾸는 젊은이들은 어찌보면 지켜야 할 자녀가 없어 가능한 일이죠.
자식이 생기면 나의 선택은 곧 가족의 몫이고 그러나 가족을 뒤로하고 떠난 윤봉길
의거활동의 기회를 엿보는 와중에 이봉창 의거소식을 접하고 김구를 찾아간 윤봉길은 일왕을 코앞에서 놓친것에 분노하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
1932년 이봉창의사의 일왕 처단 실패 직후 일왕 생일 기념식이 예정되어있음
장소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상하이 사변 승리도 함께 기념한다고함
사령관 포함해서 핵심 전범들이 모이는 자리임
큰 규모만큼 경비가 삼엄해 작전 계획중 발견한 행사 공지사항 준비물이 도시락이었음
폭탄을 도시락, 수통으로 위장할 계획을 세움
그런데 막상 던지려니 눈에 밟혔을 가족.. 아내와 아들걱정이 앞섰을 젊은 청년
자신의 심경을 담아 쓴 편지가 있어요.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자 프랑스의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들은 그런 사람이 되어라.
아버지로서 해줄수 있는 마지막 당부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이미 죽음을 각오한채 두아들에게 남긴 윤봉길의 유언.
이윽고 거사 당일 아침 마지막 조찬을 하던 중 김구의 오래된 시계를 본 윤봉길은
" 내건 2원짜리네..."
" 제 시계는 앞으로 한시간 밖에는 쓸수가 없습니다."
결국 윤봉길의 뜻대로 시계를 교환한 두사람
1932년 4월 29일 수많은 일본인, 군인이 모인 훙커우 공원은 삼엄한 경비로 입장권 없이는 입장이 불가함.
하지만 일본인 행세로 위기를 모면하고 도시락 지참도 인증.
자결용 도시락 폭탄은 옆에 두고 내내 기회를 엿보다 수통 폭탄을 투척
일본군 간부들을 향해 날아간 폭탄으로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사망. 해군 중장 노무라 실명.
많은 일본군이 즉사하거나 중상당하고 이 아수라장 속에서 살아남은 인물은?
항복의 주역은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저는 모습이 눈길을 끄는데 중국 공사 재직 당시 윤봉길 의거로 오른쪽 다리가 절단되었다고하네요.
일본군 수뇌부를 제거한 성공적인 거사.
윤봉길 의거는 임시정부의 역사를 바꾼 사건임. 상하이 임시정부를 수립했지만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미국행이죠.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다가 국민대표회의 후 흩어진 노선
자금과 인력이 부족해 쇠약해질 때쯤 침체된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함.
거사를 계획한 김구는 임시정부의 슈퍼스타로 되고 당시 중국인들이 바라본 조선인은? 난민이었다고..ㅠㅠ
만주를 침략하고 점령해 중국내 반한 감정이 극도에 달한 상황인데 일본을 처단한 윤봉길 의거에 깊은 감명을 받음
장제스는 이 소식을 듣고 극찬에 극찬을 함.
" 중국의 백만 대군이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함.
김구를 중국 정부로 초청해 첫만남을 갖고 오늘날 시진핑 같은 중국의 지도자
지원금 및 임시정부 활동 지원을 약속함.
인생사 새옹지마죠. 높아진 명성만큼 일제의 타깃이 된 김구... 그런데 임시정부는 ?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배후로 지목돼 수배신세가 됨. 당시 김구의 현상금은?
현상금이 60만원이었는데 현재 화폐가치로 약 200억원 추정됨.
심지어 중국인 서양인까지 김구 체포에 혈안이 됨.
감시의 눈을 피해 상하이를 떠난 김구와 임시정부는
1937년엔 창사로 1938년에 다시 항저우로 1938년엔 류저우로 39년엔 다시 치장으로 그리고 1940년엔 충칭으로
충칭에 정착하기 까지 8년의 도피생활이 이어짐.
김구는 죽을뻔한 적도 있었다고..
1938년 창사에서 일어난 남목청 사건에서. 독립운동 대표들이 통합을 논하던 연회에서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이 권총을 난사함
현익철 사망, 지청천 경상, 유동열 중상 김구는 중태에 빠져 병원으로 이송됨.
의사는 김구를 보자 가망없다고 판단함. 응급처치도 하지 않은채 방치했는데 그렇게 4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살아있네?
그제야 의사에게 치료받기 시작함
1940년 중국의 임시수도 충칭에 정착을 하게되고 관계를 중시하는 중국인답게
임시정부가 쫓기는 상황에서도 약속을 지킨 장제스
중국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한국광복군을 창설함
대한민국 최초의 군대인 항국광복군
연합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함
1943년 영국의 요청으로 한국 광복군을 파견하기도함
인면전구공작대라고해서 인도와 버마 전선에서 활동하는 특수공작부대에요.
총 9명의 한국광복군으로 구성됨
포로신문, 암호해독, 대적선전방송, 통신감청을 담당함
일도와 미얀마 열대밀림 지대에서 영국군과 첩보작전으로 광복군 소속 OSS요원으로
뛰어난 작전 설계와 실행력을 발휘함
인면 전구공작대원이 되기 위한 조건은?
조건1. 험난한 지형적 조건을 감당할 강인한 체력.
조건2. 영국군과 원활한 소통을 위한 영어 구사 능력.
조건3. 적군의 작전을 파악하기 위한 일본어는 기본.
뛰어난 인재들만 모아 특수 공작 훈련 후 투입함
베이컨 대위로 인면전구공작대의 연락장교로 활동함.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캐나다인이에요. 일본군 작전일지를 분석한 덕분에
일본군에 포위된 영국군 탈출에 성공함 영국군 사단장이 직접 찾아와 공로를 인정해줌.
광복군 운영 뿐 아니라 외교활동에도 적극적이었는데 1943년 일본 패망 2년전
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회담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함
카이로 회담이죠.
개최 넉달을 앞두고 장제스를 찾아간 김구는 대한민국의 자유 독립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함
대한민국 독립문제가 처음 언급된 카이로선언
김구가 이끈 임시정부가 노력한 결과에요.
가혹했던 독립운동가 가족의 운명.
아버지를 도와 다양한 독립운동에 참여함
광복을 앞두고 폐병으로 위독해짐
김인의 아내는 안중근 조카 안미생인데 시아버지 앞에 엎드려 울며..
우리남편 죽는다고.. 당신 아들 죽는다고..
페니실린이 있으면 낫게 할수 있다고
이를 악물고 단호하게 말하길..
"지금 우리 동지들이 먹지도 못하고 약을 쓰지못해 죽어가는데..
내아들이라고 어떻게 특혜를 줄수 있겠니.."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운명함.
어머니를 홀로 두고 항소를 고민했던 안중근.
안중근의 동생들을 통해 전해진 어머니의 편지
"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독립운동가 가족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억하길..
살아생전 김인의 글은
" 우리는 선구자! 어느때 어느 곳에서든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압니다."
조국의 미래를 꿈꿔온 독립운동가들의 희생. 잊어서는 안될 우리의 역사입니다.
한. 미 잠수함 작전에 돌입했는데 일본이 항복해버림.
북으로 밀려드는 소련군과 일본군 무장해제 시켜줄게 그럼 남으로 미국군도 들어가야지
이러면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군정시대가 시작됨..
점점 멀어지는 자주독립의 길.
독립투쟁과 국가 정체성을 유지해왔건만 결국 나라 잃은 정부가 된 꼴임..
개인 자격의 귀국만 허락된 김구.
" 개인이든 주석이든 중요치 않아."
"심부름을 시켜주시기 바랍니다."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불 속이나 물속에라도 들어가겠습니다."
김구가 마주한 조국의 비극
남과 북으로 나뉜 한민족. 분열과 갈등의 상황
한반도를 두고 미국과 소련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유엔의 최종결정.
남한 단독정부수립.
공산주의자는 대화가 안된다며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한반도 이남 지역에 자유주의 국가가 필요하다고 이승만은 주장.
민족주의 대표인 김구는 우리 민족을 반으로 가른다고?! 북한도 단독정부가 생길텐데..
38도 선을 베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난 그거 못하겟다고 절대안된다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됩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조국 광복의 빛을 보았으나 민족의 자주 독립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이루지 못했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
전쟁 1년전 암살로 사망한 김구는 동족 상잔의 비극은 보지 못했으나 그가 꿈꾸던 민족 통일의 소원은 우리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독립된 조국의 땅에서 우리는 어떤 꿈을 꾸며 살아가나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투쟁했던 100년의 역사처럼 우리의 마지막 소원도 이루어질 날이 오겠죠?
그들의 하루하루가 쌓아 올린 대한민국 미주공화국 100년
그들의 여정과 삶을 기억하겠습니다.
다음주에도 근현대사 강의가 이어지네용.....^^ 삼일절 하루만 기억할것이 아니라..매일매일 기억하겠습니다.
<출처: tvN 어쩌다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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