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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클라스, 한철호, 안중근 1부

by 로토루아8 2019.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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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의 진실을 찾아 끊임없이 추적하는 역사학자, 한철호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역사교육자로 오늘의 강의는 안중근 의사가 있었기에 오늘날 스스로가 있는거라고

독립투사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었겠죠!

안중근 의시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 피로 맹세한 네글자!! 대한독립. 

안중근 의사가 살았던 시대를 알아야 더 알수잇죠.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역사상 가장 뼈아픈 19세기말 근대사를 그린 드라마죠.

열강들의 이양선이 자주 출몰했던 시기이죠. 1879년에 태어난 안중근 의사

최초로 일본이 불평등 조약으로 조선 문호를 개방한 이후 일본과 조약을 맺기 전후로 갈리는 한반도의 운명

안 의사가 이토를 처단한 이유가 의거 당시도 중요하지만 그이전 일본 침략의 과정을 낱낱이 알아야 일본의 죄상을 제대로 밝힐수 있어

개방이후부터 공부를 해야해요. 안의사가 얼마나 정확히 일본의 정곡을 찔렀는가

" 한국 국민도 나라의 은인인 이토를 살해한 사람은 일본의 적이자 한국의 적이라고 난리요"

그게바로 이토의 숨겨진 이빨이에요.

일본의 치밀한 침략 과정을 보여주는 예임

" 한국이 발전 못하고 혼란해서 이웃인 우리 일본이 안타깝다고 한국을 부국강병하게 해주겠다"며

철도랑 도로랑 공장도 만들어줬다고 하며 일본편을 드는 한국인도 있었죠.

1910년 8월 29일은 한일 병합의 날이죠.

이 조약의 공식 명칭은 일본이 붙였지만.. 


한국이 지구상에서 폐멸됨을 의미하는 단어에요.

일반적으로 쓰인 용어인 합병

병합이라는 용어에 숨겨진 일제의 의도. 합병이나 합방은 맞지 않다고

합병 합방은 한국과 동등하게 합친다는 의미라 배제시킴 

아우를 병 倂 삼킬 탄 呑

하지만 병탄은 침략적 야욕이 드러나서 배제함. 대내외적인 시선을 고려해 만든 용어로 병합이라고 사용함

그러니 우리가 병합이란 말을 써서는 안되죠. 한국이 일제의 일부가 됨을 의미함

그럼 우리는 그날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국권찬탈이 맞아요.

 이 당시는 1910년 경술년에 겪은 국가적 치욕이죠.

나라가 망했으니 국망國亡

국권침탈, 한일병탄으로 불러야 합니다.

용어의 실상을 모른채 교육받았었죠. 우린...

병합은 치밀하게 고안해낸 용어에요. 단어하나 허투루 쓰지 않는군요?ㅠㅠ

100년전 만든 용어 하나에 담긴 일본의 치밀함 침략과정. 그 실체를 알아야 역사적 진실에 한발 더 다가갈수 있어요.

한일 병탄을 막기 위해 의거를 거행

치밀한 병탄 과정을 살펴보면서 안의사가 왜 이토를 응징할 수밖에 없었는가..

1871년 신미양요. 병탄 39년전 안중근 출생 8년전

조선 바다에 나타난 거대한 이양선

왜 저런 조선군에 대한 소문이...?!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 퍼진 괴이한 소문.

전세계 짱돌 던지기 장인이라고

1866년 통상을 요구하러 조선 해안을 침략한 미국의 제너럴셔먼 호는 우리의 공격에 셔먼호 선원 전원이 사망함.

응징을 핑계로 수교를 맺으로 온 함대인 미군은 조선군에 대한 소문에 쫄아서 특별 해상기동 훈련까지 실시했다고..

드디어 마주한 조선군의 실체.

1부에 10발을 쏘는 미군의 신식무기 반면 1분에 1발을 쏘는 조선의 무기

군복이 아닌 무명을 겹쳐입은 조선군 .. 상대가 안 되는 조건이었는데도 끝까지 저항하며 싸웟던 조선군.

미군 기록에 남은 전투 상황을 보면

창과 칼이 부러진 자는 돌을 던지거나 흙을 뿌려 저항한다.

학살과도 같은 참상이 일어났지만, 미국은 조선과 수교 실패함.

병력을 과시하고 수교협상을 기다린 미국 하지만 영토를 안 잃었으니 진게 아니라는 조선

끝까지 저항을 했지만 장기전을 피하고 싶었던 미국

19세기말 이 당시의 외교는 무력으로 성립됐어요. 당시 가장 강력한 무기는 군함임.

군함외교는 상대국에 군함을 보내 무력으로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려는 외교수단이에요.

19세기말 서양 열강들의 외교방식을 본떠서 일본이 따라했죠.

1875년 운요호 사건.

미국과 같은 수법으로 조선에 접근한 일본.

미국과 프랑스도 못했떤 조선개항을 일본이함.

조선 해안 측정을 핑계로 침범한 일본 군함인 운요호.

굼함에 딸린 단정을 타고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을 하자 예고 없는 침투에 포격을 가해 경고한 조선군.

가만히 있을순 없잖아요. 조선군이 포를 쏘며 경고한거죠.

일본의 배라는 표식이 있었다?!

" 일본 국기를 달았는데도 공격했다고 우리 국기를 모독했으니 응징해야한다" 고

일본군은 국기를 모독했다며 조선에 보복을 함 강화도옆 영종진을 침략해 조선군과 주민을 학살함

이노우에 함장의 보고서를 보면

" 우리 처음엔 국기 게양 안 했었다" 라고..적혀있다고하네요.

이를 기회로 본래 목적을 관철시킴. 일본은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 물으며 수교 통상 할 것을 요구함

조선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 조약이었죠.

강압에 의해 맺어진 불평등 조약으로  강화도 조약은 조일수호조규 1876년

7조를 보면 조선은 해안 측량을 허용한다.

10조 범죄사건은 자국의 법에 의해 처리한다.

해안측량 허용 조항은 조선에게만 요구한 조항임

19세기 중엽 미국에 무단으로 연안을 측량 당했던 일본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정보가 됨을 깨닫고 조선과의 조약에 관련 조항을 넣어버림.

조선 바다를 일본 군함이 제집 마당 드나들 듯해도 명분이 생김

중범죄를 저질러도 일본법에 의해 취후 판결은 일본에서 함.

서구 열강들이 만든 치외법권은 우리는 문명국이고 침략당한 너네는 야만국이라고

저 법 때문에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일본에게서 사형을 선고 받죠.

이게 다 강화도 조약의 독소조항때문이에요.

안중근 의사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운요호가 일어나기 전에

귀스타브 에밀 보아소나드 당시 그가 쓴 비밀문서에는

운요호 포격 당할시 조선에 배상 청구. 한국이 수교에 응하면 배상을 최소화 1875년 9월 11일

사전 모의했음을 시사하는 문서가 있음.

보아소나드 문서의 수신자는?

당시 공부경(산업통상자원부장관)으로 일본 외교 정책에도 관여하던 이토임

일보에게 한국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이전부터 대두된 한국 침략론. 그때부터 관련이 있던 이토히로부미.

한국을 정복하자.

19세기 중반 정한론의 토대를 만든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은 이토의 스승이에요.

요시다 쇼인은 에도 막부 말기의 사상가로 일본을 신국으로 믿고 정한론을 주장함

미국에 잃은 손실을 만해하려면 약한 나라를 차지해서 만회하면 됨. 그런 논리로 주장된게 정한론임

일본 국수주의자의 원조격이죠.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하는 아베 신조.

쇼인을 정신적 스승으로 받들며 공식 성삭에서 쇼인의 말을 인용하기도 함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로 현재도 독도를 비롯해 각국과 영토 분쟁을 벌이는 일본 .

사회 분위기는 분명 우리가 우려할 일...

1873년 병탄 37년 전 정한론이 일본 내각회의를 통과하고 정한론 실행 직전 이토의 파가 반대를 합니다.

마음은 바로 치고 싶지만 이때치면 누가 개입할수 있다?!

일본이 지면 정한론은 물거품이라고 군사력을 키워 때를 기다리자!

이토는 한국 침략에 반대한게 아니라 먹되 부작용을 최소화시키고.. 가장 완벽하게 집어삼키자!

" 피고 안중근, 만약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할 힘도 없는 한국을 방치한다면.. 한국은 멸망할수 밖에 없다."

" 동양 평화에 해가 되지 않게 일본이 보호하는 것인데 피고는 이런 사리를 모르고 있나?"

당시 조선의 개혁 실패를 구실 삼아 외면할수 없다는 거짓말로 농락을 함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쳐들어왔다는 일본.

안중근 의사는 이를 간파하고

" 대한제국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원한다며 세계에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퍼트리며 세계인을 농락한 죄"

최근 초계기 관련 사건으로 현대판 친일파들이 온라인상에서 일본이 한국을 발전시켰다고한다고

일부 역사학자들도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일제 지배로 한국이 발전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고하네요..ㅠㅠ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킬 야욕으로 행한일인데 그 이면을 보지 못하고 평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죠.

한국을 노린 일본의 진짜 속내는?!

만약 다른 강국이 한반도라는 칼을 잡으면 일본을 겨냥한다고 일본이 한반도 칼을 잡아야

한반도는 일본을 보호할 무기라고

한반도는 대륙을 침략할 군사적 요충지임. 일본이 한반도 칼을 쥐고 일으킨 두번의 전쟁이 있죠.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

한국은 빠져있는 전쟁 명칭. 조선 지배권을 두고 일어난 두 전쟁. 조선을 위해 벌였다는.. 청러와의 전쟁

조선 지도층이 침략의 명분을 준 측면도 조선에 내란이 일어날때마다 청군을 끌어들인 조선 지도층

1894년 병탄 16년전 안중근 15세

명성황후는 청나군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농민을 수탈하던 명성황후 척족들에 분노한 수천명의 동학농민

부패한 민씨 세력의 꼭대기에는  명성황후가 있고 내란의 가장 최종적 책임은 왕과왕비에게

부패의 핵심인 왕비 외척 세력을 끌어내리기 위한 운동이었죠.

민중의 반발에도 개혁하지 않는 조선 지도층 그래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되죠.

지도층에 반발하는 내란이 있을때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때마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쳥군을 끌어들인 명성황후

동학군 진압을 위해 청군이 조선에 주둔을하게되었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도 조선에 상륙함

내정개혁을 핑계로 경복궁 강제 점거함.

명성황후는 청군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대체 왜 일본군도 조선에 왔나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 주둔 조약을 맺어 임오군란 이후 맺은게 제물포 조약인데

1882년  5조에 보면 일본공사관에 병사 약간명을 두어 경비하게 하며..

이런 조항을 핑계삼아 일본인을 보호한다며 구실이 생길때마다 군대를 늘림.

군사력을 키워 때를 기다렸다가 숨겼던 발톱을 드러낸 시기가 청일전쟁이에요.

한반도와 청나라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로 전쟁 압승 후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함.

외세에 전쟁의 빌미를 준 조선 왕족.

동학군은 부패 척결과 반외세를 외치며 봉기했는데 오히려 외세 침략의 빌미가 된 비극적인 상황이죠.

조선 정부가 잘못 대처해서 도리어 나라를 위협하는 전쟁으로 확대됨.

잘못이해하고 논리를 펴면.. 청일전쟁이 동학군의 탓이 되는.. 그런 논리가 일본에도 있고

심지어 안의사도 그런 생각을?!

반외세뿐 아니라 지배층 잘못을 바로잡고자 봉기했지만 고종과 명성황후는 권력 지키기만 급급함.

일본군에 대량 학살을 당한 동학농민군. 훗날 동학군의 잔여 세력이 항일 의병으로 발전.

민초들 가슴에 묻어둔 이날의 뜨거운 의로움이 훗날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다시 타오르다.

청일전쟁을 본 프랑스 종군 기자 비고의 그림을 보면

조선인을 눈먼 장님으로 그림.

기후와 자원 조건이 좋은 영토를 탐낸 러시아는 가까운 만주와 한국을 노렸죠.

일본의 또 다른 적이었던 러시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고종은 러시아와 손을 잡게됩니다.


안의사가 이토를 처단한 첫번째 이유는?

" 대한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1895년 을미사변.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한 일본.

당시 일본의 내각 수상은 총리대신인 이토

이토가 개입됐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문서가 발견되었어요.

신분상 국왕 바로 밑이 왕비인데 고종도 이제 겁이 나죠. 왕비를 살해한거는 조선의 왕을 죽인것이나 마찬가지임

그러던 어느날 궁녀의 가마를 타고 몰래 경복궁을 탈출한 고종은 조선을 보호해주겟다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을 감.

1896년 아관파천. 병탄 14년 전 안중근 17세

일본손아귀에서 우리 힘으로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일본을 견제해줄 러시아의 품으로 간것임.

단기적으로 일본 기세가 잠잠해지기도 했죠.

하지만 국가대 국가는 공짜가 없어요. 러 공사관에 일 년간 거처하던 고종은

러시아에게 많은 경제적 이권을 넘겨줌

창피하죠... 한나라의 국왕이..자주 독립국이라면서 남의나라 공사관에 있으니..

파천 일년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 그사이 우리 몰래 만난 러.일

조선에서 세력 균형을 맞추되 일본의 경제적 우위를 인정. 그틈을 타서 개혁을 추진한 고종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국제법상 선전포고 후 전쟁을 해야하는데 일본은 청일전쟁 때도 공격 먼저 감행했고

러시아와 전쟁에도 선공격후 포고함

국제 여론이 러시아 편을 들 상황인데  

다른나라에서는 둘다 망해라... 뭐 이런 마음이었다고해요.

당시 세계 패권을 잡고 있던게 영국이고 미국과 영국은 일본 편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려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대신 러시아와 싸워줄 나라가 필요했는데 러일전쟁이전 제1차 영일동맹으로 동맹을 맺은 일본과 영국

일본 군자금의 절반을 대준 영국과 미국

1904년 병탄 6년 전 안중근 25세

러일전쟁을 벌이며 대한제국 영토를 점령한 뒤 침략의 발판을 다진 일본

점령한뒤 자꾸 조선에게 조약을 맺도록 하는데.. 대외적으로 협의된 조약인 것처럼

한일의정서 1904년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도록 할 것.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하겠다는 조항이에요. 침략이 아닌 보호이고 불법이 아닌 한국이 기꺼이 승인한 합법적인 것이다.

선침략 후 조약.

세계 열강에 일본의 침략을 알리려 고군분투했죠.

국제 정세에 너무 어두웠던 조선. 그것을 간파한게 안중근 의사에요.

열강의 감시때문에 한국을 병탄할 수 없다는 일본. 이에 대한 안중근 의사의 대답은?!



1905년 일본이 승리를 앞두고 열강들과 협상을 추진.

가쓰라- 태프트 비밀협약에 필리핀과 한국이 나오죠.

1905년 7월 일본이 한국 지배하는 대신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


1905년 8월 영국의 인도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의 한국지배권 인정 제2차 영일동맹.

1905년 9월 러일간 종전을 협상하며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러일 포츠머스조약.

안의사는 세계를 상대로 외롭고 힘든 싸움을 했던 것.

열강이 간섭하면 한국 침략이 물거품되요. 그래서 일본은 한국 병탄 전에 밑 작업을 굉장히 철저히 해놓음.

날조된 이야기임.

열강 승인 받자마자 맺은 주 조약을 보면

을사늑약과 정미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한 죄.

을사늑약 내용을 보면 일본국정부는 한국의 외교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고 라는 내용이 있는데

청일전쟁후 경복궁에 가뒀던 고종이 러 공사관으로 피신 그것을 차단하기위해 외교권을 장악한거에요.

을사늑약은 한국의 손발을 묶는 조항임.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열강승인후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낸 일본.

외교권뺏고 내적으로 하나씩 장악해가는...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하기 위해 서울로 온 이토는 정치, 군사를 감독하는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게됨.

조약에 응하도록 고종을 위협함 차라리 순국하겟다며 저항한 고종

조선정부 대신중 끝까지 반대한 한규설을 감금하고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을 찍어 늑약을 체결함

강제로 을사늑약 체결을 이뤄낸 이토

 일제의 침략 조약에 찬성한 다섯 명의 한국 대신들

나라를 판 을사오적의 탄생이죠.

고종없이 을사오적의 서명으로 이뤄진 조약은 고종역시 무효라고 주장을 함

일본도 이 조약이 불법이라 판단하고

1910년 한국 병탄 조약을 맺을 때는 친일파 이완용이 순종에게 위임장을 받아

절차상 합법을 주장함.친일파 중 이완용이 제일 유명한 이유이기도하죠.

고종은 러일전쟁 직전 중립 선언했지만 일본은 무시를 함.

세계에 을사늑약 무효화를 알리려는 노력도 햇는데

1906년 고종에게 초청장을 보냈던 러시아 .. 하지만 둘이 한통속이 돼버린..

한국 특사들은 참관도 불가능 얼마뒤 분통함에 분사한 이준 열사

열강의 도움을 기대하며 목숨걸고 갔지만 약육강식의 논리로 물든 제국주의 열강에 이를 빌미로 고종에게 특사 파견의 책임을 추궁함

고종의 아들 순종이 황제 강제 즉위하게됨

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

병탄 3년전, 안중근 의거 2년전.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한국인의 의지를 알았던 이토는 군인과 유생, 천민과 아녀자 온 민중이 의병이 되어저항하자

무력으로 탄압할수록 더 많은 민중이 의병에 투신하게됨

영구적으로 일본의 일부가 돼야한다며...

인심을 얻어 한국인이 스스로 굴복하게 해야한다고 지배도 공고해지고 오래갈수있다고

이토는 순종을 앞세워 두차례 한국 순행을 하게됩니다. 

일본이 부패한 지방의 관리를 일부러 벌주고 일종의 보여주기를 함.

일본인이 다스리지 좋은 측면도 있다고 생각하는 조선인들이 생기게됨.

가운데 있는게 이토라고하네요.

이토는 일본에서 최고 권력을 가졌던 인물이에요. 일본 수상이 높아요 조선 통감이 높아요?

일본 수상에서 조선 통감 직을 자처한 이토

안 의사가 평화주의자 이토를 처단해서 병탄을 앞당겼다. 안의사의 의거를 병탄의 원인으로..

이토가 병탄 야욕이 있었다는 증거

일본에 기록이 남아있어요.

6개월전 이미 병탄을 계획했던 이토.

이토가 원흉임을 안 한국인들을 순행이후 한국인을 복종시킬수 없음을 깨닫고 무력으로 제압할 필요성을 느낌

순행 4개월 뒤 결국 통감을 사임

러시아죠.

한국지배권을 마지막으로 다지기 위해서 1909년 10월 하얼빈으로 향한 이토

러 재무상의 영접을 받는 순간 안중근 의사가 나서서 이토를 응징함.

이토 응징 10개월 뒤 한국을 병탄한 일본.

한국을 폐멸하고자 한 이토의 야욕이 이뤄진 것.

주도면밀하게 한국을 집어삼킨 일본은 백성보다 권력지키기에 급급했던 지배층때문에 세계 열강들의 잔인한 묵인 속에서 쓰러져간 나라..

그리고 그 치욕의 역사를 지켜본 한 관찰자

메켄지는 한국은 자립할수 없으니 식민지가 되는게 낫겠다고함.

메켄지가 목격한 의병들의 항일투쟁

그렇게 매켄지가 찍은 한장의 의병사진

희망 없는 전쟁에 목숨을 건 무명의 의병들

의병들의 뜨거운 의기를 안중근 의사가 이어받은 것.

지금으로 치면 중학생 정도되는 총을 든 어린 소년 의병.

제 팔보다 더 큰총을 들어야 하는 시대였죠.

안의사도 그 시대의 사명을 향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원흉 이토를 제거함

매켄지가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일제의 편에서 기사를 썼던 매켄지는 지식인도 지배층도 아닌 민초들이

친일파에서 친한파로 돌아선 매켄지.

: 의병이 있는 한 조선은 죽지 않는다 당장 일본에 억압을 받더라도 다시 일어나 다시 자유를 찾는다."

전국 각지에서 장렬히 싸운 의병의 수는 약 30만명으로 추정됨.

그들이 지키고자 햇던 것은 왕도 포기한 이 나라의 주권. 대를 이은 의병투쟁은 훗날..

대동단결선언문 1917년.

독립운동가 14명이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하며 제창한 선언문이죠.

" 융희 황제가 삼보(주권)를 포기한 경술년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주권을 계승한 날이니 그동안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 없음이라."

" 구한국의 마지막 날은 즉 신한국최초의 날이다."

황제는 주권을 포기했지만 주권을 포기하지 않은 민중.

1910년 8월 29일 한국이 병탄된 치욕의 날이지만 비로소 국민이 주인이 된 새로운 한국의 날입니다.

우리가 주인인 우리의 국가를 만들어요.

3.1운동을 발판 삼아 이뤄낸 대한민국!!

영웅이란 동떨어진 단어가 아니고 각자 최선을 다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오늘날의 영웅이 아닐까..

다음 2부가 또 있다는데..ㅎㅎㅎ 언능 또 보고싶네용..ㅎㅎ 요런 역사적 강의가 저는 넘 좋더라고요.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내용들이 너무나 많아요...^^


<출처: jtbc 차이나는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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