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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속에 인문학- 블라디보스토크

by 로토루아8 2018.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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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까운 유럽풍의 근대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 남은 우리 민족의 발자취

과연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러시아 남동쪽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전역에 유일한 케이블카 푸니쿨료르

183m의 이동거리를 약 2분이면 전망대에  도착할수 잇다고해요.

1894년~1971년 제 4대 소련 공산당 최고 권력자가 니키타 흐루시초프임

1959년 미국방문 후 블라디보스토크를 제2의 샌프란시스코로 만들이 위해 계획을 함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부동항의 획득을 위해서임

대부분의 러시아 바다와 달리 겨울에도 얼지않는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토크

1860년대 러시아 해군항 지정으로 경제적 요충지이자 군사요충지인 러시아의 중요거점이 된 블라디보스토크

1856년 러시아인에 의해 발견된 작은 항구의 블라디보스토크로

1992년까지 러시아의 군사도시로 외국인들의 출입이 금지됐었다고해요.

2016년 기준 외국인이 선호하는 러시아 관광지 3위가 블라디보스토크임

추운 바다에서 서식하는 킹크랩 산지로 유명함 그래서 킹크랩먹으러 블라디보스토크에 온다는 사람도 있다고함

킹크랩이 매우 크고 그 이유는 러시아 바다가 매우 차갑기 때문임

바다가 차고 깊을수록 킹크랩은 크게자라고 살도 많다는 이야기

1kg 에 2000루블로 환화 약 4만원정도 한다고해요.

우리나라 절반 정도의 킹크랩 가격임

한 덩어리가 스테이크처럼 탱탱하고 쫄깃쫄깃하고 정말 바다에서 잡은 소고기 같다고

러시아 사람들이 추위를 극복하는 방법 중에 사우나가 있어요

러시아 사람들은 바냐라고 부름

순식간에 방을 가득 채운 열기

따뜻함을 느끼고 싶을땐 위로 열기를 식힐땐 아래로 이동

달군 돌에 물을 뿌려 발생한 증기를 이용한 방식이라고해요.

10세기로 추청되는데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 시작햇다고해요.

바냐는 50% 이상의 습도를 유지해주고 70도 열기의 바냐 내부

몸이 사우나 안에서 숨쉬려면 먼저 옷을 탄의해야한다고함.

바냐의 하이라이트는 자작나무 베니크 마사지임

우리나라에서 때를 밀듯 자작나무가지로 몸을 때려 노폐물을 제거

사장님이 준비한 요리는 러시아식 꼬치구이 샤슬릭임

그릴 통에 숯과 나무를 넣어 꼬치를 굽는 샤슬릭

요즘엔 채소와 해산물 등 취향에 맞게 즐기는 음식으로 발전

샤슬릭은 중앙아시아 유목민 문화가 전파된 것으로 추측하는데 샤슬릭의 어원은 튀르크족의 언어로 꼬치에 꿴 것이라는 뜻임.

날씨가 너무 추우니까 몸을 데푸기 위해서  먹는 보드카!

보드카의 나라답게 다양한 종류의 보드카가 총출동

보드카의 이름은 물= 러시아어로 voda에서 기원했다고해요.

영하 40도 추위는 추위도 아니고 40도 이하술은 술도 아니야

술 판매를 5시간으로 제한하고 주류 가격을 인상햇다고해요.

술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갖은 방법으로 밀주를 만드는 것이 성행했고

1980년대 말 금주법 철회로 지금도 10시 이후에 술을 팔지 않는다고해요

보드카는 서민들이 누구나 쉽게구할수 있는 술이었거든요

매우 싸고 저렴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애용할 수 있는 러시아인들에겐 음식으로서 한 부분을 차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는 열차를 타고 7일~ 15일 정도 소요되요

우리나라 경부선의 20배 지구둘레의 4분의 1 길이임

새로 건설된 선로로 인해 현재 철로의 길이는 9,334km입니다.

1891년 황태자 니콜라이 2세가 착공한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1916년 완공되었는데 열차 건설에 소요된 기간만 25년임

기차를 따라가면 바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와 연결이 됩니다.

원래는 중국땅으로 1860년 베이징 조약체결로 러시아의 땅이 된 블라디보스토크

멀리떨어진 지역에 척박한 땅으로 죄수들의 유배지였던 블라디보스토크

모스크바에서 6,430km 거리로 개발이 어려워 잇는 철로를 건설하기 시작함

러시아가 더욱 큰 나라로 발돋움할수 있던계기가 됨

동서로 이어지는 젖줄 시베리아 횡단 열차부터 시작된다고 볼수 있습니다.

다른 교통수단보다 편리해 러시아 시민들의 발이 되어주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헤이그특사는 1907년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사절단입니다.

헤이그로 가기 위해 이준과 이상설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이동함

비장함을 갖고 열차를 탔던 또 한사람이 잇다고해요.

그리고 열차에 오른 또 한사람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선수!!

시베리아 횡단 열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은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던 고려인들임

그때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는 시간

고려인 문화센터로 연해주에 있는 한민족의 흔적과 역사를 볼수 있는 장소입니다.

한국 노래와 북한노래 러시아 노래도 배운다고함

매주 토요일에 20명이 합창단에 모여서 배운다고함

러시아어로 소리나는 대로 적은 한국 노래가사

원곡은 라트비아 가요로 러시아 노래로도 유명한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일생입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고려인이라 불리는 한인들

1937년 고려인들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킨 사건으로

한 칸에 네 가족씩 넣었다고해요.

혹독한 시베리아 땅을 빈 몸으로 횡단했던 고려인들은 생서를 넘나들며 도착한 낯선땅

허허벌판에서 시작된 삶과의 사투

무려 17만명이나 되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열차를 태워서 중앙아시아에 뚝 떨어뜨려 놓았던 전대미문의 사건이 있습니다.

1937년 스탈린의 주도로 일어난 한인 강제이주정책

고려인 강제이주의 표면적 원인은 바로 일본의 첩자활동 방지를 위해서라고함

1937년 중일전쟁까지 일으킨 일본이 두려웠던 소련


또 다른 내면적 이유는 비약적 발전한 고려인 단체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성실한 고려인을 이용해 중앙아시아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하려는 속셈입니다.

우리에겐 너무 절망감이었겠지만 결국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서 열심히 살았던 제 2의 고향이었던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되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려 4대가 함께 살고 잇는 고려인 대가족!

다시 여기로 와서 20년 살았다고함

강제이주 초기엔 잠을 잘 곳조차 없어 움막에서 생활한 고려인들

아무것도 없는 낯선 땅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은 고려인들

그 어떤말보다 가슴에 와 닿는 한마디 나는 조선 사람이다.

수십년이 흘러도 가슴 한 쪽에 남아있는 한민족에 대한 자부심

전부다 고려음식임.

강원도 감자떡과 비슷한 생김새임

여전히 고려인들에게 남북이 아닌 하나로 기억되는 조국

노래한국에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

19세기말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이 많이 정착했던 블라디보스토크로 배를 타고 이주해 대부분 항구 근처에 정착함

항구앞 교통의 요지였던 한인들의 초기 정착지인 개척리

쭉 따라 올라가면서 한인들이 다시 정착한 곳이 있어요.

여기서 쫓겨나니까 그쪽에 정착한거라고해요. 그쪽을 신한촌이라고해요.

1863년부터 배고픔을 피해 하나둘 연해주로 이주를 해온 한인들

지게꾼, 잡부등 가장 힘들고 험한 일을 하며 제2의 고향을 개척해 나간 고려인들

급기야 황무지였던 땅을 개간해 농토로 만듬

이제는 역사속에만 존재하는 수만명 고려인의 삶의 터전임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신한촌

이동휘는 1873~ 1935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총장 군무총리를 지낸 인물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늘어난 한인드르이 연해주로 이주함.

우수리스크에 남겨진 독립운동가의 집

고려인들에겐 너무나 존경받았던 인물이 바로 최재형 선생님입니다.

항일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여 고려인들에게 존경받았던 인물임

우루리스크에 남아있는 집은 일본구을 피해 마지막까지 살았던 곳임


공사중이라 어지럽게 잔해들이 널브러져있음

러시아인의 손에 넘어가 오랫동안 방치되어있었는데

2015년 우리 정부가 매입하여 최재형 기념관으로 꾸며질 예정이라고해요.

이문으로 나가셔서 바로 저 밖에 있는 일본군에게 잡혔어요.

가족들과 함께 있었던 최재형의 마지막 순간

생사의 갈림길에서 가족들을 살리는 문을 택했던 최재형 선생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는 선택을 하는 것에 있어서 크게 생사를 거는 선택은 안하잖아요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생사를 거는 선택을 너무 많이 해야 하는 시점이 아니었을가 싶다고

고려인들의 페치카= 따뜻한 난로임

따뜻한 난로처럼 계몽과 항일에 힘써 고려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최재형 선생

노비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 9살에 부모님을 따라 연해주 지신허에 정착햇다고해요.

11살에 가출하여 러시아 선장의 도움으로 크게 성공을해 거의 재벌급이되었다고

사업으로 연해주에서 어마어마하게 성공함.

다국어도 가능해 연해주 한인들이 키운 상품을 판매하는 길이 되어줬다고해요

최재형 활동 중 가장 대표적인 한가지는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배후에서 지원해줌

안중근 의사의 변호사 비용까지 지급해주고 그후 비참한 삶을 살게 된 최재형 선생의 가족들

평생을 

잊혀진 역사의 흔적을 찾은

얼굴덜룩하게 칠한 신한촌 기념비

기념비의 의미를 모르는 일부 부분별한 사람들의 만행임

1999년 기념비가 세워진 이후부터 줄곧 이곳을 지켜온 이 베체슬라브 씨

어떠한 보수도 없이 오직 사명감으로 지켜온 18년의 세월

지금은 홀로 기념비를 지키는 이 베체슬라브 씨

우리가 잊고 있던 러시아 땅의 우리 역사를 홀로 지킨 세월

결국 참아왔던 외로움을 쏟아내심..ㅠㅠ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도 않는 그런 곳을 지켜내겟다고 이렇게 계신게

세 개의 기둥은 한국과 북한, 해외 동포를 상징하는거라고해요.

흩어지고 나뉘어도 우리는 한 민족임을 상징하는 기념비임

오랜 세월 한국인의 뿌리를 지키며 살아온 고려인들

고려인 강제 이주 81년 우리의 역사를 기억합시다.

<출처: tv 조선 배낭속에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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