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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클라스, 정조의 화성 건설과 화성행차.

by 로토루아8 2022.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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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 속 그림 속에는 왕의 모습이 없는데 왕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면 왕의 신비감이나 권위가 반감될 수도 있죠. 왕을 그리기는 그려요. 왕의 어진은 따로 제작해서 보관을 합니다. 또 중요한 것이 어진을 제작하는 과정을 의궤로 기록하죠.

 

 

 

1902년 어진도사도감의궤에는 고종황제와 황태자의 어진 제작과정을 기록, 어진을 제작한 그 과정이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의궤에도 왕의 모습은 없습니다. 

 

 

일월 오봉을 표현한 병풍인 오봉병과 왕이 앉았던 의자 용상, 왕이 앉았던 간이 의자인 용교의 그림만 있다고 해요. 이것만 감질나게 그려두고 정작 왕의 어진은 그리지 않았다고 해요.

 

4교시 의궤로 보는 조선왕실 행사. 정조의 화성 건설과 화성행차.

꼭 소개하고픈 의궤로 조선시대 위대한 건축물 수원화성과 관련된 의궤예요.

 

 

1796년 정조의 효심과 정약용의 지혜로 만든 수원화성이죠.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죠.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으로 쌓은 성곽이라고 해요. 조선 성곽 건축의 꽃인 수원화성, 그리고 수원화성의 공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

 

 

화성 공사 과정을 잠깐 소개해보면 1789년 사도세자 묘를 수원화성 쪽으로 이전한 정조는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던 사도세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아들 정조, 1762년 양주 배봉산 아래 조성됐던 사도세자의 묘를 정조가 즉위 13년 뒤 화성으로 이전을 합니다. 그런데 원래 그 지역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요. 원래 있었던 관아와 민가를 옮겨 새롭게 조성한 신도시가 바로 수원화성이에요. 정조가 만든 최초의 신도시입니다. 

1794년 종조 18년에 수원화성 공사가 시작됩니다. 

 

 

조선시대 한 냥의 가치는? 한냥이면 대략 쌀 20kg을 구매할수 있다고해요. 지금의 약 4~5만원.  사극에 구걸장면이 자주 등장하잖아요. 한푼만 줍쇼라고 하는데 한품은 한냥의 1/100이에요. 한 푼의 가치는 대략 400~500원이에요. 800,000냥 X 5만 원 하면 40,000,000,000원이에요. 엄청난 비용이 쓰인 대규모 공사죠. 그만큼 국가의 총력을 기울였던 거예요. 에상시간을 크게 단축시켜 약 2년 반 만에 완성했다고 해요.

 

 

당대 최고의 과학 기법이 동원됐기 때문이죠. 예나 지금이나 열정은 충분한 대가에서 나오는 법이죠. 일한 만큼 임금을 지급해줬다고 해요. 공사기간을 단축시킨 비결은 1794년 1월 공사를 시작했고, 1796년 9월 공사를 완료합니다. 공사 과정을 기록한 게 화성성역 의궤입니다. 활자본으로 간행한 것이 이 의궤의 특징입니다. 

활자본으로 간행한 이유는? 여러 부를 찍을수 있기 때문이죠. 공사 성과를 널리 알리고자 했던 정조는 일종의 국정 홍보를 위해 여러부를 제작했고 행사 참여자들에게도 배포를 했다고 해요. 다른 의궤에 비해 분량도 많은 10권 9 책으로 구성. 관계자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의궤는 70만 명은 연인원이고

 

 

평민들은 어떤 이름을 썼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될 수도 있네요. 실명을 모두 기록한 이유는 내 이름을 걸고 일한다는 뿌듯함,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끼게 해 주려는 의도도 있었을 거라고 해요. 공사실명제의  시초라고 해요. 각자 받은 품삯도 모두 기록되어 있다고 해요.

 

 

근무 일수를 하루의 반까지 계산했다고 해요.

화성성역 의궤가 위대한 또 하나의 이유는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거예요. 그런데 등재 과정에서 논란이 발생합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성고 가이 훼손됐는데 보존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던 수원 화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했는데 1970년대에 복원한 문화재라는 것이 쟁점으로 떠올랐다고 해요. 이때 제시했던 화성성역 의궤를 근거로 원래 모습을 그대로 복원했음을 어필했다고 해요.

 

 

유네스코 조사관도 경탄을 금치 못했던 방대하고 상세한 자료를 보면 거의 원형대로 한 것이나 진배가 없다고 해요. 그리고 1997년 수원 화성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성공하죠. 이것이 바로 위대한 기록의 힘입니다. 

 

 

한편 수원화성 공사 중 행차를 기획했던 정조는 공사 진척 상황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조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 씨가 환갑을 맞이하는 해인데 어머니와 나이가 같았던 아버지 사도세자는 아버지가 살아있었다면 환갑을 맞이했을 해라 고해요. 이를 기념해 을묘년 행사를 계획했는데, 환갑잔치를 여는 것은 물론 성대한 양로 잔치도 개최했다고 해요. 행차를 비롯한 8일간의 행사를 기록, 서울 종로구 창덕궁에서 화성행궁으로 향했던 행차. 첫째 날 시흥 행궁에서 하룻밤을 묵고 중간에 쉬었던 장소도 모두 기록되어 있어요.

 

 

1779명의 사람과 779 필의 말이 동원된다고 합니다. 

 

 

장거리 행차잖아요. 가까운 거리는 가마꾼이 들지만 말안장에 올려서 이동한 건 장거리 행차라는 거예요. 그림을 또 잘 보면 사람들이 한쪽만 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전방 담당, 측면 담당 등 각자 역할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에요. 정조의 능행 코스는 지금도 수원을 어느 쪽으로 많이 가나 면 시흥에서 안양을 거쳐 가는 길, 

 

 

2. 과천을 거쳐 가는길, 험준한 남태령 고개를 넘어야 했던 과천 코스,  그래서 시흥 쪽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 정조. 이때부터 신작로라는 말을 쓴다고 해요.

 

 

1박 2일이 소요된 여정이에요. 그중 가장 난코스는 한강을 건너는 것이라고 해요. 다리도 없던 시절 정조가 한강을 건넌 방법은 무엇일까요? 행차 중 가장 난코스가 한강이었어서 다리를 놓진 못하고 배를 이용했어요. 조선시대 한강변을 무대로 활동했던 경강상인들, 경강상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배를 활용했는데 가운데 가장 큰 배를 배치하고 점차 작은 배를 사용해 아치형으로 배다리를 건설했다고 해요.

배다리 위치의 조건은 수원과 가까운 곳이어야 하고 강폭이 좁은 구간 이어야 해요. 그리고 유속이 느려야 하는데 조건에 부합하는 곳이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대교 자리라고 해요.

 

 

정조 때 배다리를 세웠던 그 자리에 1917년 훗날 세워진 최초의 인도교인 한강대교죠. 배다리 위해 소나무 판자를 올리고 흙과 잔디까지 깔았다고 해요. 과학적으로 설계된 배다리는 화성 행차의 또 다른 걸작으로 꼽힌다고 해요.

 

조선시대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의궤에는 배다리 건설을 누가 했다고 나오진 않아요. 하지만 정약용의 업적임을 알 수 있었던 배경은 자찬묘지명을 남겼는데 죽은 이의 업적을 기록하는 묘비명에서 정약용은 스스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본이라 생각해 유배에서 돌아온 뒤 스스로 묘지명을 지었다고 해요. 정양 욕이 배다리를 설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해요.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기록의 중요성.

 

<출처: Jtbc 차이 나는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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