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판 탄핵사건의 주인군인 제 15대왕 광해군
광해군하면 떠오르는게 중립외교인 실리외교잖아요. 연산처럼 탄핵됐지만
한편으로는 개혁 정치를 펼쳤던 왕인 광해 탄핵된 두왕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는 시간이 될거라고함
역사속에 기록된 광해의 삶
역대 광해 역을 맡은 배우들이
불의여신 정이에선 이상윤, 왕의 얼굴에선 서인국, 왕의여자에서는 지성~
최근에 대립군이란 영화보셨나요?
거기선 진구가 광해역을 했었죠.
영화 , 드라마 효과로 바뀐 광해의 이미지
진실도 있지만 허구적 상황이 더 많아요~
15일동안 승정원 일기의 기록이 사라졌다~ 현재 남아있는 승정원 일기는 1623~ 1910년까지 인조~ 고종때까지 기록만 현존한다고해요
이얘기 자체가 거짓임
그리고 개혁적인 성향으로 능동적인 외교 정책은 진실임
허구와 역사적 사실을 비교하며 영화를 보는 것도 관람 포인트에요.
드라마지만 징비록에서는 광해는 괜찮은 인물이었다고
전쟁에서 백성들과 함께 나라를 지켜낸 광해 그런데 광해는 왜 탄햇됐을까요?
광해가 폐위되기까지의 시대적 상황을 엿보는 시간이 될거라고하네요.
광해군이 1575년 생이고 연산군은 1476년 생이에요
조선 15대 국왕이고 아버지는 선조죠 어머니는 공빈
선조의 후궁이었던 어머니 공빈 김씨
최고등급인 빈, 귀인, 소의, 숙의, 소용, 숙용, 소원 .. 최저등급인 숙원까지
최고등급인 빈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된다?
빈이 붙는 후궁은 왕의 아들을 낳은 것.
왕실의 적자란? 왕비 혹은 계비의 아들은 적자
왕비나 계비가 생존하면 왕은 후궁을 들일 수 있어요. 선조의 적장자는 없어요.
광해는 적자도 장자도 아님
출신성분 콤플렉스인 서자에서도 둘째였던 광해
영창 대군의 누나인 정명공주의 인생을 다룬 드라마가 화정이죠. 이연희씨가 맡은 역할이었다고함
연산과 광해 같은 폭군을 실록에는 어떻게 표기했을까요?
어린 시절의 광해군은 면접을 잘 본 일화가 있어요.
왕실에서 왕손들을 대상으로 세자 면접을 진행했는데 13대 국왕인 명종이 선조 형제들에게 실시한 면접
바로 익선과을 쓴 어린 하성군 선조의 두형
이때 막내였어요 젤 어렸는데...
이 면접으로 왕위를 거머쥔 14대 국왕인 선조
한번 사양하고 평생 쓰는 전략이엇던 거죠
아버지에 이은 면접의 신인 광해의 일화
명언으로 쓰일 만큼 사람에게 꼭 필요한 소금
속 깊었던 광해의 어린 시절
아이의 미래를 점치는 돌잡이 느낌이죵?
연필 잡는걸 좋아해요.
어릴때부터 광해의 총명함을 보여주는 일화에요.
청년일때 임진왜란에서 큰 활약을 펼친 광해
임진왜란때 광해의 나이는 열여덟이었어요. 소위 분조활동이라고 해서
그런데 전쟁 전까지 세자로 책봉되지 않은 광해
조선 시대의 세자 책봉시기는? 원래 세자는 나이가 10세 전 후한 시기에 하는데
보통 왕으로서 20년 정도 재위하다가 죽게되는데 광해의 세자 책봉을 미룬 선조
그 이유가 의인왕후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적자를 향한 선조의 욕심
광해를 출산하며 얻은 후유증으로 사망한 공빈 김씨 이때 선조의 마음을 사로잡은 또다른 후궁이 등장합니다.
광해에게는 세자책봉 기회가 된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7년동안 2차례에 걸쳐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 맞서 싸운 전쟁이에요.
1592년 4월 30일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 간 선조 그런데 평양에서도 불안한거에요.
마지못해 전쟁 중에 광해를 세자로 책봉함
분조를 이끌고 노숙도 불사하며 민심을 수습하기 시작한 광해 그런 광해를 열렬히 지지한 백성들
덩달아 조정의 신망도 높아진..
전쟁이란 국난을 극복하며 세자의 자리를 공고히 한 광해
이후 정치를 펼칠 때에도 도움이 된 값진 경험 당시 광해의 활약이 담긴 기록
동궁= 세자 광해군
전란 중 백성의 희망이었던 광해
선조와 함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신성군 사망
여러모로 광해를 세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 됨
전쟁이후 백성들의 신임을 잃은 선조
선조의 문제점이 가장 드러나는 부분이 전쟁 후 공로에 따라 공신 책봉을 하며 상을 수여하는데
상과 벌을 주는건 정확해야 돼요. 하지만 임진왜란의 공로 평가가 잘못됐다?
자신을 보필한 공을 더욱 인정해줌
잘못된 논공행상의 예에요.
선조가 생각한 승리의 이유는?
이순신, 권율 등이 전쟁에서 열심히 싸운 것보다
" 명나라의 도움으로 왜적을 평정했다"
전쟁의 공로를 잘못 평가한 선조
지금은 이런모습이 많이 완화됐지만.. 한동안 이런 이야기 많이 들으셨죠?
역사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큰 문제를 야기한다!
선조의 꼼수가 수차례 선위 파동을 일으킨 선조
신하들과 자식을 떠보는거에요.
선위 파동 소동만 무려 19번
명나라의 세자 책봉 반대와 이런 문제 때문에 조정이 시끄러워져요.
사대관계이기에 명나라의 결재를 받아야 해요.
그렇다해도 명나라가 광해를 반대한 명분은?
명나라가 광해의 책봉을 반대한 결정적인 이유는
후궁이 낳은 셋째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려고 계획함
명나라 대신들의 반대의 부딪힌 만력제는 광해를 세자로 인정하면 명나라 셋째 아들 책봉의 선례가 되기에
선조의 꼼수에도 팽팽히 맞선 대신들~
전쟁이후 병으로 사망한 의인왕후 박씨
의인왕후 박씨의 3년상이 끝남과 동시에 1602년에 재혼에 성공한 선조
1602년 선조의 나이는 51세
그런데 문제는 그 새엄마가 아들을 낳아버리면
명나라의 승인전 조선에서는 광해의 세자 책봉이 끝난 상황이에요.
영창 대군이라는 또 다른 라이벌의 등장으로 둘로 나뉜 조정
광해 편에 줄을 섰던 사람들이 영창대군쪽으로 가는거에요.
당시 광해군과 영창 대군의 지지세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정의 세력변화인 당쟁사를 봐야해요.
사림파는 조선 중기 성리학을 숭배하며 결접된 재야의 양반층으로 선조 때 관직에 진출해요.
한정된 관직에 비해 사람이 넘쳤던 상황임
도성을 기준으로 동쪽에 사는 사람과 서쪽에 사는 사람으로 나뉨
다시 동인 내부의 분열이 발생합니다.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됨
남인정권을 장악했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북인 정권시대가 되요. 북인에서 다시 분열이 되요.
선조가 영창 대군을 아낄수록 소북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해요.
소북의 영수는 유영경 소북의 영수를 영의정에 임명함 대놓고 소북에 힘을 실어준 선조
그때 대북의 핵심인물이 누구냐면..
정인홍은 임진왜란 당시 고령 의병장으로 활약을 하고 광해의 정신적 지주에요.
영창 대군의 세자 책봉을 종용했던 유영경 목숨걸고 유영경의 탄핵 상소문을 올린 정인홍
하지만 선조의 뜻을 거스른 정인홍은 유배당함
1608년 선조의 승하로 당시 영창대군의 나이는 세살임
차마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었던..
일부 신하들에게 영창 대군의 보호를 당부한 선조 혹여나 광해의 세력이 영창 대군을 해칠 것을 우려함
선조 승하로 발등에 불 떨어진 소북파 순식간에 전세역전됨
정인홍은 돌아오고 유영경은 처형당함
우여곡절끝에 15대 국왕에 오른 광해 그때 나이는 33세였다고해요.
즉위 초 개혁 군주로 떠오른 광해는
1598년 임진왜란 종전 후 1608년 10년뒤 즉위한 광해
긴 전쟁의 후유증으로 여전히 피폐했던 상황인데 게다가 토지 대장도 사라지고
조선시대 납세제도가
광해, 왕이된 남자 영화에서 당시 상황을 묘사해준 장면이 나와요.
세금을 내기위해 고리를 빌리다보니.. 집과 밭을 잃는 것도 모자라 노비가 되어야 했던 백성들..
농사꾼에게 공물로 전복을 부과하고 지역특산물을 공물로 징수함
이 특산물에는 함정이 있어요.
대동법의 핵심은 쌀로 통일을 하자!
공납은 민가의 호별로 부과되는데 토지의 결수에 따라 공물을 부과하는 것.
이전에는 대동법을 실시하지 않은 이유는?
지주= 관료
대동법 시행을 두고 대신들의 반대가 극심
백성들을 생각해 대동법을 밀어붙인 광해..
당시에도 경기도 지역을 우선으로 대동법을 시행하죠!!
200여년 동안 공고했던 세금 제도를 바꾼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어요.
실제 실록에서는 저렇게 적극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하는게 아니라 이원익 등 관료들이 대동법 실시를 건의했다고
영화는 실제 실록을 근거로 픽션을 가미한 것이죠.
이렇게는 하지 않았다는 거죠. 반대파들까지 처음엔 끌어안아요.
광해 즉위 뒤 첫 영의정이 된 인물이 이원익이에요. 이원익은 대북 정권과 대립하던 남인 세력이에요.
선혜청 설치 등 대동법 실시에 큰 공을 세운 이원익
전쟁수습 두번째로 화재로 소실된 서적재간행을 함
일명 책 정리 사업임 경국대전, 국조오례의등 조선의 주요 국서를 다시 제작해 보관함
특히 주목되는 책 중의 하나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에요.
삼강오륜할때 삼강이랑 같아요.
삼강행실도는 세종때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서적이에요.
이책은 조선판 만화에요.
그전에 삼강행실도는 중국 사례 위주였는데 이건 우리나라 사례로 엮은 책인거에요.
동국은 조선의 이야기만 엮어 편찬한거에요.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은 물론 효자와 열녀 등의 이야기를 엮어 편찬한거에요.
또한 흠경각영건의궤를 제작함 자격루, 해시계등 흠경각 과학 기구를 보관하는 건물의 건축 보고서를 제작함
화기도감의궤는 무기 제작 과정을 글과 그림을 정리한거에요.
국방 문화, 과학 경제까지 즉위초에는 뛰어난 군주의 기질을 보여준 광해군
서적 간행의 화룡점정은 동의보감이에요.
명나라에 대해서는 불신이 있었던 듯한 광해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를 겪어왔던 광해군
명나라 군대가 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했지만 조선을 지키려는게 아닌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았던..
명을 향한 불신과 악연이 있었을 것. 동아시아의 정세가 변화되고 변방의 여진족이 세운 후금의 등장
후금과 명 사이에 놓인 조선의 운명
그런데 광해군이 곤란해진 이유가
후금을 명을 치는데 명에서 조선에게 도와달라고함.
광해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이때 도원수 총사령관은 바로 강홍립
강홍립의 포지션은 외교관으로 외교로 거란족과의 전쟁을 막은 고려장군 서희와 비슷함
무슬보다 외교에 능한 강홍립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함 결국 명을 돕기위해 참전을 함
우리 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함
당시 광해군이 하사한 비밀편지가 있는데
후금이 명을 도운 조선을 공격하려고 할때 적극적으로 강화협상을 했던 강홍립
역사적으로 하족이 세운 나라에는 우호적 예를 들면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등
반면에 변방의 요, 금, 원나라에겐 적대적이었던...
호박, 호도. 모두 오랑캐 호라고해요. 호도는 복숭아에요. 호주머니!
북방민족들은 날씨가 추우니까 옷에 주머니를 만들었잖아요.
당시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캐치한 광해
훗날 인조 정권으로 광해군 정권이 무너진 이후 광해와는 정반대의 외교정책을 펼친 인조
친명배금 정책!
그 대가는 혹독했어요.
명나라와 친교를 유지하고 금나라는 배척한다. 그결과 후금의 칩입으로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발발
광해의 중립외교를 무시한 겨로가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인조.
이제 시작되는 폭군이야기..
계축년 1613년 계축옥사
문경 새재 은상 살인사건
문경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수백냥을 약탈함 사건을 주도한 강도를 잡아보니까
칠서지옥은 일곱 명의 서얼들이 일으킨 옥사에요. 취조과정에서 밝혀진 놀라운 진실
인목대비 아버지인 김제남의 주도로 거사 자금을 마련해
강도가 아닌 역모사건임 김제남등 거론된 이들 모두 처형함
이 사건의 화살은 결국
영창이 살아있는 한 역모는 계속 될 것!!
우리나리로 여덟살때 강화도로 유배된 영창 대군
골방에 가둬서 온돌로 불을 때는 거에요.
어린 나이에 무참히 처형된 영창대군
권력에 유리한 대로 해석함
연산의 간신인 임사홍에 버금가는 간신이 등작합니다.
바로 영창 대군을 엮을 음모를 꾸민 대북파 이이첨 대북 소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려면
어떻게든 왕권과 직통라인을 결성해야함
어머니인 인목대비죠 광해와는 법적으론 모자관계 하지만 영창대군의 죽음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사이임
지금의 경운궁 덕수궁에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광해군 그리고 전혀 지원을 안 해줘요.
바로 서궁 유폐
이와함께 광해는 경운궁의 명칭을 서궁으로 격화시키고
대비의 서궁 유폐를 두고 성리학을 근거로 반대하는 세력이 결집을 함
반대 세력에게서 매몰차게 등을 돌린 광해
영창대군을 죽인 뒤부터 궁의 분란이 생기기 시작함
정리하자면 왕권에 대한 집착
폐모살제 이후 폭군의 길을 걷게 된 광해
이럴때 꼭 범하게 되는 실수가 바로 미신 풍수지리에요.
궁궐 건설에 올인을 하게됩니다.
이때는 술사의 말을 믿는거에요.
술사의 말 한마디에 세워진 궁궐
공교롭게도 그 집에 살던 인조가 즉위를 하게 됨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은
경복궁의 10배 규모의 인경궁을 건설하다가 도중에 광해가 폐위되자
인경궁 건설에 사용된 목재들은 기존 궁궐 보수에 활용되면서 흔적조차 사라진 인경궁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청기와로 된 전각인 선정전
광해의 취미는 뭘까요? 채색 안료 수집!!
미신 믿는 사람이 색에 집착하는 법
크고 화려한 궁궐 건설에 집착했던 광해, 무리한 토목공사의 폐해이기도하죠.
당시 상황을 풍자한 용어가 많이 생겨요
힌트= 재료
뭐 짓는데 사용되는 재료? 궁궐 재료를 제공해 관직을 얻은 사람
일명 오행당상
따놓은 당상할때 당상= 관직을 뜻해요.
정 3품이상이 당상관이에요.
김치정승 이렇게 내리곤했다고
무너져가는 광해를 조롱한 백성들... 광해군에게는 김개시
그래서 김개똥이 이름이에요.
개시= 개똥
김개시 역을 맡았떤 배우가 이영예였다고해요.
드라마 서궁에서 개똥이를 사랑하는 남자였다는 정태우
개똥이가 궁궐에 들어가자 개똥이를 끝까지 지켜주기 위해서 내시가 됐던..
ㅋㅋㅋ 이영애와 함께 촬영한 적이 있다고 자랑하심~
실록에 기록된 김개시의 모습은?
장녹수도 용모는.. 중간이하였던...
실록에 김개시의 기록은 상당히 많은 편이에요.
더욱 광해를 부치기며 광해의 눈과 귀를 막은 김개시
끝까지 연산 곁을 지킨 장녹수 반면 김개시는 막판에 배신을 함
인조반정의 주도 세력과 결탁해 김자점 등 서인 세력에게 뇌물을 받고 반란을 도모함
계속 광해에게 역모정보가 올라와요
김개시는 인조반정 직후에 처형당하고
광해를 무너뜨리는 인조반정이 일어납니다.
광해와 인조의 악연
인조의 동생 능창군이 광해 역모 사건에 연루되면서 결국 유배지에서 자결한 능창군
인조의 아버지가 정원군이라는 인물인데 이 이로 화병을 얻은 아버지마저 연이어 사망함
반정 세력이 인조를 추대할 때 수락 후 직접 거사에 참여함
반정 당일 반정 군들은 홍제원에서 모여 궁궐로 출발함 인조는 연서역에서 합류해 반정을 도모함
크게 세가지에요.
1. 패륜정권
성리학의 정신에 위배되죠. 폐모살제라해서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동생을 잔인하게 죽임
2. 외교정책
우방 명나라를 배신하고 후금과 친교를 맺은 행위
3. 궁궐 조성 사업
무리한 토목공사로 민생의 부담 가중됨
조선 역사에서 두번째 반정이 성공하는 장면이죠.
1623년 반정 이후 유배를 간 광해는
13년뒤 더 멀리 떨어진 교동도로 이동을 합니다.
마지막에는 제주도로 옮겨져 쓸쓸히 생을 마감함
유배생활은 18년을 했던.... 연산은 흥청망청 놀던 사람이 갇혀서 살게되면서 얻은 스트레스 때문에
죽게됐는데 광해는 어떻게 보면 멘탈이 강했다고 보여지는게 광해의 아들인 폐세자, 이지
박선영이 김개시로 나왔을때 잠깐 특별 출연을 했던 태우
땅굴을 파고 나갔으나... 저렇게 지키는 포졸들에게 발견되었다고...ㅠ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죽은 폐세자 이 충격으로 화병에 걸린 폐비도 사망함
이모든 상황을 지켜보고도 유배지에서 18년을 살았던 광해
유배중에 시를 남긴 것까지 닮은 광해와 연산
광해의 삶이 보여주는 것
밝은 정치를 펼친 성군일지라도 한순간 혼군이 될 수 있는 것.
서인이 기록해 과장됏을 가능성이 농후해 이런 관점에서 광해는 정쟁의 희생양일 수 도 있다고
반정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광해의 문제를 과장했을지도..
이를 뒷받침하듯 당시 민가에 퍼진 노래.. 상시가라는 노래였는데
백성에게는 새 정권 역시 광해정권과 다르지 않았떤.. 현실
바로 이런것이 역사에서 중요한거에요.
당시에는 폭군을 무너뜨린 성공한 반정이었지만 연이은 전쟁으로 더욱 피폐해진 백성의 삶.
단지 광해만의 문제는 아닐수 있어요.
역사를 알아야 미래를 알 수 있다.
500년 전의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반복되는걸 보면서 헤쳐 나갈수 있는 일인지..
아니면 인간세계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일인지..
역사를 알고 정확한 인식을 한다면 반복되는 잘못을 조금은 줄일수 있어요.
그렇게 역사는 발전해 나가는 것!!
차이나는 클라스는 진짜 다양한 주제들로 매주 얘기해줘서 넘나 재밌어요..^^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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