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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파원 25시 102화,검은 왕비 카트란 드 메디시스의 발자취.

by 로토루아8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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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 권력의 화신, 잔혹한 대학살의 주범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발자취. 

프랑스 역사 속 최악의 빌런, 검은 왕비라고 불리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 

 

 

1519년에 태어난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이탈리아 대부호 메디치가 출신입니다. 카트린은 프랑스로 시집을 갑니다. 당시 문화계의 선두 주자로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이탈리아, 

 

 

카트린의 시아버지인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문화에 심취합니다. 심지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납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탈리아인인 카트린을 며느리로 선택했죠.

그러자 프랑스 귀족들이 반발합니다. 

 

 

카트린은 왕비가 될 수 없게 둘째 아들과 결혼을 시키겠다고 하고 그렇게 성사된 앙리 2세와 카트린의 혼인.

그런데 카트린의 결혼 생활에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그 이유는 앙리 2세가 사랑한 여인 디안 때문입니다. 

낯선 곳인 프랑스에 시집와 외롭게 지낸 카트린, 둘째 왕자와 결혼해 왕비가 될수 없던 상황인데 그런데 왕위 계승 받을 첫째 아들 앙리 1세가 지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얼떨결에 왕이 된 남편 앙리 2세.

 

 

그렇게 프랑스의 왕비가 된 카트린.

프랑스의 비극이 시작된 사건이 있습니다. 앙리 2세가 마상 창 시합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합니다.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하게 된 카트린. 그녀는 어쩌다가 검은 왕비로 기억된 것일지?!

 

검은 왕비 카트린의 발자취.

첫번째 장소는 쇼몽성입니다. 

 

 

프랑스 최장 길이인 루아르강 중심에 위치한 루아르 계곡은 역사적 가치가 깊은 다양한 고성들이 자리한 곳입니다. 

그 중 문주가 찾아갈 성은? 바로 카트린이 살았던 성입니다. 

 

 

 

 

앙리 2세가 집권하던  1550년부터 카트린이 거주한 성입니다. 동화속 성 같은 모습이네요.

쇼몽성에는 카트린의 어떤 흔적이 있을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방입니다. 16세기 제작된 직물 공예와 당시 카트린의 침대를 재현한 공간입니다. 방의 한편에는 카트린의 전신 초상화가 있습니다. 

카트린 거주 당시에는 침실, 욕실, 식당으로 사용하던 공간입니다. 현재는 카트린의 방으로 꾸며놓은 공간입니다. 

 

 

의문의 문양이 반기는 방 주인의 정체는?!

 

 

이탈리아 출신의 점성가 루기에리인데요. 다양한 학문을 익힌 자식인이었던 카트린, 그쯤 점성술에 큰 관심을 가진, 카트린을 향한 루기에리의 예언, " 카트린은 자녀 10명을 낳을 것이다." 

 

 

예언 적중, 앙리 2세와의 사이에서 얻은 5남 5녀, 그 이후 점성술을 맹신하게 된 카트린. 

카트린의 이런 모습은 " 그녀가 이곳에서 흑마술을 이용해 정적을 암살했다." 검은 왕비가 되는 데 일조한 루기에리와 점성술. 카트린의 결혼 생활은 외로웠는데, 그렇게 점성술에 빠지게 된 그녀는 점성가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합니다. 

카트린을 만난 유명한 예언가는 바로 노스트라다무스입니다. 

 

 

1555년 쇼몽성에서 만난 두 사람,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젊은 사자가 황금빛 새장 너머 늙은 사자의 눈을 찌른다. 두 상처가 하나 되어 참혹한 죽음을 맞으리라"  예언 후 4년 뒤, 앙리 2세가 딸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젊은 기사와 마상 창 시헙을 펼치게 됩니다. 그리고 앙리 2세의 눈을 관통하게 되죠.

예언대로 앙리 2세가 사망하게 되고, 소름 돋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그 이후 더욱더 점성술을 맹신하게 되죠. 

 

카트린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던 쇼몽성, 다음 장소는?

두번째 장소는 슈농소성입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인 곳.

성으로 가는 길에 펼쳐진 가로수 길, 영화 속 성으로 가는 기분이라고.  6개의 아치로 이뤄진 다리가 아름다운 성입니다. 

 

 

슈농소성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다리 위의 공간을 갤러리로 사용하는 이곳은 깔끔한 분위기로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나요. 실용성과 고급스러움을 모두 갖춘 공간입니다. 

 

 

갤러리 후 다음 장소는 디안 드 푸아티에의 방.

바로 앙리 2세의 정부입니다. 카트린과 결혼 후에도 아내는 뒷전이고 디안을 총애해 슈농소성까지 선물한 앙리 2세. 

남편 앙리 2세가 사망하자마자 카트린은 슈농소성을 강탈합니다. 

 

 

디안을 향한 카트린의 복수, 그런데 정말 소름 돋는 부분은 디안 방 안의 카트린의 초상화입니다. 

 

 

초상화에서 눈에 띄는 검은 상복은 앙리 2세의 죽음 이후 계속 고수한 상복차림이라고 합니다. 

이탈리아 시골에 가면 남편 사망 후 남은 생을 상복을 입고 살아가는 전통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엄격한 가톨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전통입니다. 그런데 약간 앙리 2세를 애도하는 느낌보다 이미지 메이킹용이라는 설도 있다고해요. 이런 검은 옷을 즐겨 입는다는 이유로 검은 왕비로 불린 카트린. 

 

 

성을 빼앗은 이후 카트린이 실제 사용한 방입니다. 디안의 방 못지않게 화려하게 장식해 놓은 공간.  카트린의 화려한 방을 지나면 슈농소성의 마지막 공간인 유난히 채광이 좋은 방이 나옵니다. 

 

 

녹색 집무실인데 밝은 방 분위기와는 달리 카트린의 욕망이 시작된 곳입니다. 

앙리 2세 사망 후 첫째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즉위했는데, 

 

 

 

1년 반 만에 중이염으로 사망하고 셋째 아들 샤를 9세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의 나이는 고작 10살.

본격적으로 카트린의 섭정이 시작됩니다. 섭정이 시작된 녹색 집무실입니다. 그 후 카트린의 섭정은 3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권력 강화 수단은 정략 결혼으로 대표 사례가 영국 메리 여왕과 스페인의 펠리페 2세입니다.

 

 

부부관계였던 두 사람, 메리 여왕의 사망으로 돌싱이 된 펠리페 2세에게 카트린이 연락을 합니다. 큰 딸인 엘리자베트와의 혼인을 제안합니다. 흔쾌히 혼인을 수락했지만, 엘리자베트마저 요절을 합니다. 

스페인과의 관계를 끊기 싫었던 카트린은 막내딸인 마고를 통해 이어가려 했던 관계, 혼사가 이루어지기 직전에 혼란한 국가 상황으로 혼인이 무산됩니다. 자식들을 이용해서까지 권력을 차지하려 했던 카트린. 권력욕의 시작점은 슈농소성인거죠.

 

세 번째 장소는 생 제르맹 록세루아 교회입니다. 

섭정으로 얻은 카트린의 권력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장소입니다. 

 

 

13세기에 건축된 파리 1구에 있는 교회로, 생 제르맹 록세루아 교회에는 종탑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을 모두 목격한 종탑. 도대체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요?

 

카트린의 막내딸인 마그리트 드 발루아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엄마 카트린의 정치적 희생양인 마그리트 마고.

 

 

신교와 구교의 대립이 극에 달했던 16세기 프랑스,  종교 갈등 해결 방법은?? 바로 결혼이죠. 

신교 국가인 나바라 왕국의 왕자, 

 

 

구교 대표인 마고 공주, 둘의 정략 결혼을 추진합니다. 그런데 마고가 남친이 있는거죠?!

 

 

앙리 드 기즈는 같은 구교 집안으로 종교 갈등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아 이 둘은 카트린에 의해 강제 이별을 하게 됩니다. 이후 1572년 8월 18일 마고와 앙리 4세의 결혼식이 거행되고 

 

 

마고의 오빠 샤를 9세가 강제로 대답을 하게 합니다. 함께 피로연에 참석한 신교도 핵심 인물인 콜리니 장군과 앙리 4세.

 

 

그리고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지는데, 다름 아닌 콜리니 장군을 향한 공격. 카트린을 암살 배후로 추정하는데 그이유가 무엇일까요?  종교 화합을 위해 결혼을 주선한 왕비가 왜 그런걸까요?

 

콜리니 장군을 아버지처럼 따르던 샤를 9세는 신교에 회유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그로 인해 권력을 뺏길 수도 있다는 위기감, 이러한 이유로 카트린이 암살 시도했다는 설도 있죠. 

 

 

아무래도 이 결혼식은 신ㄱ도 몰살을 위한 함정으로 받아들인 앙리 4세. 

 

 

일단 때를 기다려 보기로 한 신교 세력, 이때 신교 군대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카트린,  " 신교도 하객들은 분명 긴장 풀고 있을 것이다. 그때 신교를 치자'" 

카트린은 섭정으로 실질적 권한이 없어요. 아들 샤를 9세를 협박합니다. 카트린의 지시로 신교 몰살을 명령한 샤를 9세.

성 바르톨로메오 대축일에 맞춰 종이 올리고 종로시와 함께 시작된 신교도 학살.

파리 사망자만 약 3천 명, 프랑스 전국 사망자는 최소 1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프랑스 최악의 내전인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권력에 눈이 먼 행동으로 비난받게 된 카트린. 

 

 

카트린의 입장에서는 반발심만 남은 아들은 권력 행사에 방해가 되니까 카트린이 샤를 9세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알베 생각엔 카트린의 나쁜 이미지는 프랑스의 역사가 만든 것. 프랑스에서도 카트린 재조명 여론이 등장했다고 해요. 프랑스인들이 카트린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은거 같다고 하네요.

 

포크문화, 르네상스 건축등 여러 문화를 전파한 카트린, 또한 셔벗, 마카롱, 향수와 발레 등도 전파. 

프랑스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정치가 라는 평도 있어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대부분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여왕 마고에서 나온 설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뒤마의 상상력이 가미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대학살로 인한 프랑스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원망할 대상을 카트린으로 정해 그녀를 악마로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설도. 

프랑스 대표 권력의 화신 카트린의 일생을 둘러본 시간.

 

출처: 톡파원 2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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