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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파원 25시, 고품격 미술투어: 네덜란드, 김성은 특파원.

by 로토루아8 2023.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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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품격 미술 투어,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 반 레인. 네덜란드에선 고흐보다 엄청 유명한 분이라고 해요. 미술 하면 딱 렘브란트!

 

 

17세기 바로크 시대 네덜란드 대표 화가인 렘브란트 반 레인, 역사화, 초상화, 풍경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빛의 마술사입니다. 네덜란드 최고 화가죠. 고흐보다 더 자랑스러운 화가입니다. 과거 레덜란드 화폐에도 있었어요. 심지어 고흐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로 내 인생의 유일한 스승은 렘브란트라고 했죠.

 

 

고흐는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를 보고 보름동안 이 작품을 마음 편히 볼 수 있다면, 신께서 내 인생을 10년을 가져가도 좋다고 말했다고 해요. 렘브란트가 처음 그림을 그린 시기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정식 화가가 되기 위해 필요했던 일련의 단계가 있습니다. 수습공은 장인에게 훈련을 받기 시작하는 단계,  직인은 수습 기간후 심화된 기법들을 연마하는 과정, 장인은 모든 수련 과정 후 작품 심사를 통과해야 취득이 가능합니다. 짧게는 15년, 길게는 18년 그런데 렘브란트는 이 과정을 렘브렌트는 약 6년만에 수료합니다. 누구보다 빠르게 조기 졸업을 했죠.

 

 

19살에 마스터가 되어 공방을 오픈했고, 20대 초반엔 제자 양성까지 했다고해요.

 

 

라스트만이 1년 교육한 후 이제 안 나와도 되겠다고, 천재가 알아본 천재.

라스타만이 거래하던 미술 중개상까지 소개해줬다고 해요. 

 

 

렘브란트를 만날 첫 번째 장소는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입니다.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수많은 작품을 전시중인 라익스 뮤지엄.

 

 

수많은 렘브란트의 작품 중에서 1628년에 그린 20대 초반의 자화상. 명암이 도드라지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선명한 한쪽 얼굴, 그림자가 진 반대쪽 얼굴.

렘브란트 라이팅은 인물의 전면 45도에서 얼굴에 음영을 주는 조명 기법입니다. 빛의 방향에 따라 얼굴의 음영이 확연히 드러나죠. 얼굴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조명 기법이죠.

 

 

영화 친구에서도 렘브란트 라이팅 기법을 활용한 장면이에요.

심지어 자화상을 100점 가까이 그렸던 렘브란트.

어린 시절부터 평생 그렸던 자화상, 파란만장했던 렘브란트의 인생.

 

 

자화상에 담아낸 렘브란트의 굴곡진 인생, 

다음으로 감상할 작품은 렘브란트가 1661년에 그린 자화상입니다. 

 

 

어느덧 50대가 된 렘브란트의 모습이죠. 파산 후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입니다. 미술계에서도 혹평만을 받았던 힘들었던 시간. 작품을 살펴보면 히브리어로 적힌 성서를 들고 있는 모습이죠.

 

 

기독교 역사에 등장하는 성인 중에 유일하게 검을 상징물로 사용했던 사도바울.

 

 

렘브란트가 이 자화상을 그렸을 때, 모든 것이 무너지고 인정받지 못했던 시기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도 바울에 빗대어 

언젠가는 사람들이 내 작품을 이해하지 않을까?!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렸던 자화상이라고 해요. 일생을 담은 수많은 자화상을 남긴 레브란트.

 

 

다음 작품은 벽에 걸려 있는 유명한 작품이에요. 지금 복원하는 중이에요. 2019년부터 한창 복원중인데 이 유명한 작품을 복원한다고 수장고에 넣어두면 안되니깐, 복원 중인 상태로 전시 하는 중이라고 해요. 

원래 그림의 이름은 "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과 빌럼 반 루이텐부르크의 민병대"  그래서 보통 이 작품을 야경이라고 불러요. 출정을준비 중인 민병대라 야간 출정이라 오해를 하긴 하죠. 사실 실내에서의 모습으로 좌측 창으로 빛이 들어와요. 그림 완성 후 작품 보호를 위해 바니시 작업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묻은 때 때문에 초반보다 더 어두워졌죠.

 

 

그렇게 야경이라 불리며 고착화된 작품명입니다. 이후 때 제거 작업을 하며 낮 풍경이라는게 알려졌지만 오랜 시간 야경으로 불려 밤 풍경으로 오해 받는 작품이에요. 지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야경.

당시엔 질타를 받았던 작품이에요.

 

 

검은색 옷에 붉은 띠를 두른 사람이 반닝 코크 대장인데  그옆에 하얀띠를 두른 사람이  빌럼 반 루이텐부르크 부대장. 

두 사람이 이끄는 자경단 18명의 요청으로 그리게 된 집단 초상화입니다. 18명이 똑같은 돈을 냈지만, 존재감 확실하게 표현된 두사람.

 

 

집단 초상화를 그리게 된 이유는 17세기 길드 체제가 성행했던 네덜란드, 길드란 중세 유럽에서 도시를 중심으로 결성된 동업자 조직입니다. 당시 길드 회원의 모습을 그려 걸어두는 게 유행했는데 마치 결혼식 기념사진 찍듯, 그렸던 집단 초상화입니다. 

 

 

누구 하나서운하지 않게 비슷한 크기로 그렸던 인물들 이에 렘브란트는 집단 초상화가 너무 밋밋하다며 민병대에 방점을 두고 화풍을 고민한 렘브란트.

당시 스페인과 독립전쟁 중이던 네덜란드, 자발적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힘을 모았던 민병대, 이들의 모습을 역사화처럼 그려보자. 역동성을 살려 민병대의 모습을 그렸던 렘브란트. 집단 초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죠.

 

 

네덜란드 황금기를 이끈 상인들의 집단 초상화인 포목상 조합의 이사들.

길드 회의실 벽난로에 전시하기 위해 의뢰된 작품이에요. 렘브란트는 작품 위치를 고려해 위에서 내려다보듯 그린 작품입니다. 

렘브란트의 삶과 당대 문화가 녹아 있는 다양한 작품을 만났던 라익스 뮤지엄.

 

두번째 장소는 드 바그입니다. 

1632년 한 작품을 통해 부와 명예를 누리게 된 렘브란트. 

 

 

외과 의사 길드에 전시하기 위해 렘브란트에게 의뢰했는데 살아 있는 듯한 생생한 인물 묘사와 빛과 어둠을 활용한 독창적인 표현 방식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그림이죠. 집단 초상화의 혁명으로 불렸으며 이 작품을 통해 암스테르담에서 최고의 화가 반열에 오른 렘브란트. 작품을 의뢰한 사람들이 말하길 얼굴만 나와도 감사한데 우리를 마치 성인처럼 그려줬다며 이후 렘브렌트에게 끊임없이 몰려든 집단 초상화 의뢰.

 

 

렘브란트의 인생을 한순간에 바꿔버린 작품이죠.

 

 

바로 이곳은 작품 내 해부학 강의가 실제로 열렸던 곳이라고 해요. 그 당시 입장료를 내고 보러 갔던 해부학 강의.

현대 사회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클래식 공연 보러 가듯, 입장료를 내고 단체 관람을 했던 해부학 강의. 전용 극장까지 있었던 일종의 문화생활. 렘브란트가 살았던 시기의 암스테르담에서는 해부학 강의를 본다는 것 자체가 영위하고 있는 문화생활을 뽐내는 행위죠. 심지어 데이트 장소로도 활용됐다고 해요. 렘브란트의 또 다른 명작이 탄생한 곳이 바로 드 바그입니다. 

 

 

다음 장소는 렘브란트가 그의 인생 처음으로 미술을 배우기 시작한 곳.

암스테르담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위치해 있고, 이곳에서 렘브란트는 언어와 역사를 공부합니다. 하지만 공부보다 그림에 흥미가 있었죠. 라틴 학교 중퇴 후 그림에 전념을 했다고해요. 그런데 현재 학교 내부는 출입이 불가합니다. 그던데 특별한 경험을 위해 팬들은 꼭 들르는 장소중 하나라고해요.

 

 

프레임이 표시된 곳에 10초간 서 있으면 렘브란트가 초상화를 그려줍니다. 

 

 

프레임에 맞춰 얼굴을 대고 빤히 쳐다보면 얼굴이 서서히 나타나요.

 

 

톡파원 25시에서만 알려주는 꿀잼 스폿!

다음 날 레이던 시청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운이 가능합니다. 렘브란트에게 초상화를 받을 수  있는 곳.

 

마지막 장소는 렘브란트 하우스 뮤지엄입니다. 암스테르담에서 렘브란트와 함께 지낸 미술 중개상 헨드릭 반 윌렌부르흐.

 

 

스승 라스트만이 소개해 준 미술 중개상으로 그로 인해 헨드릭의 사촌인 사스키아와 처음 만나게 됩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1634년 결혼에 성공하게 됩니다.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던 사스키아, 그녀가 가져온 엄청난 지참금, 당시 지참금이 4만 길더로 약 53억원이었다고 해요. 렘브란트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던 사스키아, 그녀가 가져온 돈도 중요하지만 귀족이었던 사스키아, 덩달아 렘브란트는 신분까지 상승하게 되죠. 당시 그림을 그리는데 많은 돈이 필요해요.  귀족 집단의 새로운 멤버로 합류하게 되죠. 사스키아로인해 승승장구. 그러나 그녀의 조건만 보고 결혼한 것은 아닙니다. 사스키아를 굉장히 좋아했던 렘브란트. 

 

 

사스키아의 초상화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는 부부의 금실. 천재 화가 렘브란트와 귀족 사스키아, 그들의 결혼 생활을 알 수 있는 집은? 1639~ 1658년까지 약 20년간 거주했던 집이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이 집을 구매할 당시 금액은 1만 3천 길더로 약 17억원. 한국으로 치면 강남 테헤란로, 당시 암스테르담 평균 집 가격의 10배나 비싸요. 입장료는 25000원입니다. 

 

 

렘브란트는 전 세계 희귀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는데 미술품부터 동물 박제까지 다양한 종류의 희귀템. 

경매 중독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렘브란트를 쇠락의 길로 몰아넣은 과소비. 첫번째로 많이 벌고 많이 쓴 렘브란트.

희귀품을 모았던 이유는 뭘까? 그림을 분류하는 다양한 장르가 있는데 초상화, 역사화 , 풍경화 그중 최고는 역사화죠.

렘브란트는 역사화가를 꿈꿨죠. 그런데 역사화는 과거 이야기고 재현할 소품이 필요하죠. 소품을 위해 희귀품을 구매했는데 사치를 했다고는 보기는 어렵겠네요?!

하지만 렘브란트의 진짜 문제는 희귀품의 감정이 불가하다는 것. 그래서 사기도 많이 당했어요. 매주 벼룩시장이 열렸는데 렘브란트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전국에서 온 상인들, 단 한 명을 위한 시장이란 걸 모두가 알지만? 렘브란트만 모르는 거죠.

 

 

렘브란트의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있는 거실과 침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렘브란트는 한순간에 많은 것들을 잃었습니다. 

렘브란트에게 찾아온 비극, 두 사람의 첫 아들과 두 딸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게 됩니다. 

 

 

심지어 사스키아가 29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녀가 떠나기 전 남긴 유언은 렘브란트가 재혼을 하면 유산을 상속받을 수 없다. 

이런 유언때문 오해가 있었지만, 함께 사는 내내 금실이 좋았던 두 사람, 저런 유언을 남긴 이유는 아들 티투스 때문입니다. 

 

 

원래 부부의 자녀는 총 4명인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둔 세 자녀.연속된 비극 끝에 얻은 마지막 아들 티투스. 그러나 티투스를 낳고 9개월 후 세상을 떠난 사스키아. 떠난 후에도 눈에 밟혔을 티투스. 재산 관리인을 지정합니다. 관리인에게 자산을 모두 맡긴 후 남편에게 매달 돈을 나눠서 주라고 합니다. 그림밖에 모르는 바보라 미래의 일을 알 수 없으니 남편과 아이를 위한 안전장치를 만든 것.

유산을 한번에 상속하지 않고 양육비 형식처럼 분할로 지급, 유언에 재혼을 명시한 이유는 렘브란트가 재혼을 했을 때 아들을 돌보지 않을 것을 대비, 친척이었던 헨드릭에게 양육을 부탁합니다. 아들이 문제없이 자랄 수 있도록 한 안전장치. 렘브란트는 결혼 생활 중에는 문제가 없었어요.

 

 

야경을 그릴 때 세상을 떠난 사스키아, 아내는 떠났지만 그림은 게속 그려야 했던 렘브란트.

5년후 티투스를 양육해 줄 유모를 한명 더 고용하는데  이때 들어온 유모가 헨드리케 스토펠스입니다. 

 

 

렘브란트는 그림밖에 모르는 바보여서 신께서 선물로 헨드리케를 보내주셨다. 실제로 렘브란트에게 많은 도움을 줬던 헨드리케. 더군다나 사스키아를 닮았던 헨드리케,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문제, 렘브란트는 결혼을 할 수 없습니다. 재혼을 하면 유산 상속이 끝나요. 그렇기에 결혼을 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사실혼 관게를 유지합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칼뱅교로 결혼 없는 동거는 종교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매장된 두 사람,당시 렘브란트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이때부터 쇠락의 길을 걷기 싲가한 렘브란트. 그러나 수입은 줄어도 지출은 줄지 않아요. 지출은 그대로인데 수입이 줄다 보니 점점 빚이 쌓여갑니다. 결국에는 파산까지 결국 힘든 말년을 보낸 렘브란트.

 

 

불행 중 다행으로 그의 곁에 남아있던 한 사람. 많이 사랑했던 두사람은 결국 죽음 후에도 함께합니다. 헨드리케와 함께 묻힌 렘브란트. 그의파란만장한 인생을 엿볼 수 있는 곳.

 

출처: 톡파원 2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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