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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클라스 28회 - 광주의 진실 <황석영 II>1

by 로토루아8 2017.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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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내로 흩어진 학생들 

시내 한복판에서 학생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5월 19일 새벽. 첫 희생자가 발생함.




80년 5월 20일 밤 11시 광주역 앞.



광주역 전투는 5월 20일 밤 계엄군이 최초의 집단 발포해 3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해요.



목숨을 걸고 군인들을 향해 행진했고 80년 5월 20일 아수라장이 됨.

20일 밤에 광주역과 도청에서 



계엄군이 시민을 살상하면 시체건 부상하건 다 싣고 갔는데



누구나 분노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임.


설상가상 고층건물에 계엄군은 저격수를 배치했는데







연이어 다른 젊은이가 뛰어 나가보지만 어김없이 총탄이 쏟아졌고


생존자를 구출하려는 시민들에게도 총탄이 쏟아져

수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학살이 벌어짐.




무기를 구하기 위해 광주 주변 지역으로 이동을 햇고



80년 5월 21일에 광주 주변 지역 무기고를 탈취해 시민들은 무장하기 시작함.





시민들도 식칼이나 곡괭이나 쇠파이프로 무장하기 시작해요

잔혹한 진압에 적대적으로 변해버린 시민들















군인들에게 교육하길 빨갱이들이 광주를 점령했다고



인간이라면 참을 수 없는 분노. 

평범한 소시민에게 가해진 무자비한 폭력.



당시 시민군의 대부분은 20대로 거의 가구공. 요식업체 종업원. 단순 노동에 종사하는 청소년들 이었어용.



80년 5월 21일 오후 4시에 계엄사령관 윤흥정. 7.11 공수여단 퇴각 지시를 

내렸다고해요.



시민군과 계엄군은 사상자가 많이 발생할 것 같고

시민들이 그냥 물러나지 않을것.







작전을 바꿔 계엄군, 광주 봉쇄 작전을 진행했다고해요



하지만 광주는 전화 통신 전부 두절됌!!




계엄군 광주철수 후 외곽에서 빈번히 자행된 시민학살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생기고 광주지역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 등 20인으로

구성된 시민 대표 위원회.



대부분 광주시민의 지지를 받은 수습대책 위원회의 요구사항이지만

수습과정에서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뉨.





자기가 당했던거, 자기 아들 죽은 이야기 그런거 얘기함.

광주 보도를 통제해 세상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



외신기자들이 그 속보를 자기나라나 전 세계에 알렸지만

미국도 그 사실을 묵인함.












역으로 이야기하면 미국이 승인했던 것과 동시에 



광주항쟁은 좌. 우의 문제가 아니라




광주항쟁은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한 사건이고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상식 밖의 일임.



상식선에선 시민들의 치안을 지키는 건 경찰인데

모든 상식과 기본을 무너뜨린 전두환 신군부





텅빈 거리를 돌며 시민들에게 호소하던 여학생












대답대신 서치라이트를 깬 시민군

그 총성을 신호로 시작된 시민군- 계엄군의 교전




그중에 좋은 군인을 만난 사람을은 총을 던지면 살려줬다고

사는 자와 죽는 자가 엇갈렸던 광주


80년 5월 27일에 30~40명의 시민이 사망했고

시민에게 총칼을 겨눴떤 군인들



지난 며칠동안 수많은 사람이 죽고 무고한 죽음에 대해

어떤 사과나 처벌도 이뤄지지 않고






총칼을 든 계엄군 앞에서 최후의 선택을 한 시민군












광주항쟁이후 가족들의 추도 집회조차 막았던 정부.





 두사람을 위한 영혼 결혼식

유족들이 모여서 실컷 울었다고해요



전국에 알릴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겟다고



YWCA사건은

1979년 11월 24일 서울 YWCA에서 모여 유신헌법 철폐와 계엄령 해체를 요구

집회 관계자 140여 명을 연행. 구속한 사건임.





전남대학생 김종률 씨가 작곡





광주항쟁을 굉장히 껄끄러워하고 

말하자면 왜곡시키려고하고 폄훼하려는 세력이 계속 있었다고




결론은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노래라고





고정간첩이 아닌 다음에야...ㅎㅎ 그렇게 만들긴 힘들거라고






북한 작가가 선생님의 책을 자료로해서 써서 이름을 넣엇다고함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림. 영화. 마당극. 당시의 체험담






이제 좀 편해지려나 했는데...

광주 관련 자료를 들고 찾아온 항쟁 생존자 두사람.



이미 몇명에게 거절당하고 온두사람.


맨마지막에 황석영을 찾아옴.



내가 안하면 누가 안하냐며 받아들였다고해요.

왜냐하면 모르던 일들이 너무 많다고 각자 처한 개인들이 겪었던 일들이 너무 슬프고

이를테면 고등학교 선생님의 부인이 걱정돼서






최종원고가 황석영에게 넘어왔고 

항쟁기록물은 출간 이후 벌어질 일에 대비해

이걸 완벽하게 책임지기 위해서 자필로 써야겟다고


수백장의 증언록을 직접 옮겨 적기 시작했다고해요




평생 온갖 구설수에 시달렸다고



탈고를 마친 원고를 가지고 두군데에 나눠서 인쇄를 진행했는데





대학가 서점을 통해 유통되기 시작했고

그때 한창 복사기가 유행해서 복사해서 보고 했다고하네요.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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